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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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의 다른 어머니의 삶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5. 20. 05:09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1500년대에 선조와 광해군시대 인물로 한시와 그림에 능하고 강릉출신으로 신사임당은 아들이 율곡 이이이고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로써 조선에 신여성으로 여겨지는 능력있는 여성이지만 이들은 다른 삶을 살았다고 본다. 신사임당은 초충도로 곤충과 식물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이는 그림도안으로 자수를 하기 위해서 그렸다고 보기도 하고 일화로 한복이 쓸모없게 되자 포도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 대구 간송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남편은 능력이 다소 무능하여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고 하며 신사임당은 죽어서 유언으로 당당하게 자식 7명이여 충분하고 새장가 들지 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허난설헌은 유복한 집안에서 8살에 한시를 지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고 나중에는 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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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북간도 일대는 우리 역사라고 보는데 그것들의 과거 모습은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5. 18. 04:07
단군 2333년부터 고조선의 땅이었던 만주일대를 광개토대왕이 고조선의 영광을 재현하고 발해 대조영도 해동성국으로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였으나 지금은 중국땅으로 넘어간 만주일대를 다시 한번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2세기에 고려시대에 여진족인 금나라가 두만강일대에 동북9성을 침략하자 예종때 별무반을 만들어 윤관이 무찌르기도 하였는데 이 뒤를 이은 여진족의 일파인 후금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하고 중국을 지배하였는데 조선 북쪽을 만주라고 통칭하였다. 원래 만주는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만주슈리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청 태조 누르하치도 자기를 만주슈리라고 하였다는데서 그 유래를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일본인이 이지역이 만주라고 불려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조선강점기에 일본이 19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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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건국 후 고려왕족 최후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4. 9. 04:10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국력이 쇠하고 막강권력을 소유한 신하인 이성계와 동맹관계 조서를 맺는 상황이 연출되고 이성계는 정비 안씨에게 공양왕의 폐위조서를 작성하게 하고 공양왕은 왕위를 물러나게 되었다. 이성계의 킹메이커인 정도전은 성균관 대사성인 이색계열의 관료 56명을 파직하고 유배를 보내어 숙청을 단행하고 정몽주도 이방원의 철퇴를 맞았다. 길재는 관직을 주어 조선왕조에 회유하려고 했으나 거절하여 그 제자들이 성종이후 사림파를 형성하여 훈구파를 흡수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고려 왕건의 왕족 즉 개성왕씨의 왕족들은 강화도, 거제도, 삼척 등지로 유배를 보내고 공양왕은 삼척으로 유배되어 가다가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 왕족들도 바다로 수장시키는 등 개성왕씨의 색출 몰살작업이 자행되었다. 태종 이방원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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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시대의 풍운아 허균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4. 3. 03:37
허균은 선조와 광해군때 활약했던 명문가 집안으로 태어나서 글쓰기가 능했으며 명석한 두뇌로 천재와 같아서 시대를 앞서갔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여러계층의 사람과도 어울려서 신분이 천하더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은 조정에서 높이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썼는데 여기에서 홍길동은 명문가문의 서자로 출세길이 막히자 의적 활빈당을 조직하고 부패한 양반의 재산을 탈취하여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결국에는 율도국을 세워 차별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얘기이다. 이는 광해군 1613년 칠서지옥사건과도 연관이 있는데 허균은 당대 명문가문 서자 7명이 신분차별 항의를 한 사건에 연류되었으나 그의 절친인 이이첨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어가서 살아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이첨의 나팔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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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돈은 개혁신하 인가 요승인가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3. 6. 03:30
고려말의 개혁군주라고 일컬었던 공민왕은 원명교체기에 원의 세력을 과감히 처단하는데 특히 원의 권문세족을 처단하고 몽고풍을 폐지하고 그들의 권력기구인 정방을 폐지하는 등 기존의 원나라의 사위국가로서 충렬왕 등과는 전혀 다른 정치를 펼쳤다.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기득권을 혁파하기 위해 스님인 신돈을 최고 권력자로 등장시켜서 노예를 평민으로 해방시키는 전민변정사업을 실시하였다. 산과 강을 경계로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권문세족은 신돈과 대립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려고 하였으나 공민왕의 후원하에 신돈은 그들의 세력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엄청난 견제에 신돈은 공민왕이 버리는 카드가 되었다. 고려사나 고려국사에서 고려는 근본이 없는 왕조로 몰고 조선의 정당성을 위해 신돈이 반야와 함께 그 후왕인 우왕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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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 백범 김구 선생님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3. 1. 04:37
황해주 해주에서 1876년에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원정 승려로 활동하다가 부친 3년상을 탈상한 후에 감리교에 입문하였다. 그후 교편을 잡고 안악양산학교 재직중 안악사건에 연류로 조선총독부에 연행되어 5년간 수감되었다 가출옥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을 시작으로 두루 임정에 참여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 직후 항일무장 투쟁단체인 한국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거, 윤봉길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1940년 10월부터 47년까지 임정 주석을 역임했다. 광복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통치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임정 법통 운동을 추진했다. 1948년에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1949년5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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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그린 ‘대동여지도’ 김정호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2. 18. 02:53
황해도 출신인 김정호는 조선후기 지리학자이며 지도제작자로 가정형편이 가난한 몰락한 잔반이나 중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한양으로 이주해 남대문 밖 만리재에서 살았고 18세에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고 최한기 청구도 제문에 나오고 있다. 1834년 순조때 동여도지를 1차 편찬하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를 펴냈다. 그 뒤 1851년 철종때 지지로 여도비지를 편찬하고 5년후 동여도를 편찬하고 1861년 철종때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가 탄생했다. 동여도지에서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가 서로 불가분관계임을 인식하고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려야 뗄수 없는 관계로 치국의 대경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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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에 좌우합작 주도 몽양 여운형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2. 16. 03:42
여운형은 일제시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문제 관련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고 그해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3.1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해임정이 수립시에 위원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일제의 초청으로 개인자격으로 동경을 방문하여 여러 일본지도자와 만나 조선의 자주독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29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재직하게 되어 체육청년학생에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활동을 하다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몽양은 은둔생활을 하였고 일제의 친일활동을 거절하며 지냈다. 해방전에 1944년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1945년 해방되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