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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시대의 다른 어머니의 삶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5. 20. 05:09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1500년대에 선조와 광해군시대 인물로 한시와 그림에 능하고 강릉출신으로 신사임당은 아들이 율곡 이이이고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로써 조선에 신여성으로 여겨지는 능력있는 여성이지만 이들은 다른 삶을 살았다고 본다. 신사임당은 초충도로 곤충과 식물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이는 그림도안으로 자수를 하기 위해서 그렸다고 보기도 하고 일화로 한복이 쓸모없게 되자 포도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 대구 간송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남편은 능력이 다소 무능하여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고 하며 신사임당은 죽어서 유언으로 당당하게 자식 7명이여 충분하고 새장가 들지 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허난설헌은 유복한 집안에서 8살에 한시를 지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고 나중에는 남동생인 허균이 누이시집을 편찬하였다. 그 한시집이 명나라와 청나라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본에도 소개가 되는 등 그의 한시능력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안동김씨 가문에 15살에 시집가서 남편은 기생집에 주로 가고 시어머니는 그의 능력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지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이 일찍 죽어서 한시로써 그의 슬쁨을 달래다가 27살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여성의 지위는 언제 바뀌었냐 하면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고구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때는 장가들다라고 표현하여 장인집에 사위가 들어가 살았다는 서옥제가 있고 이 제도는 조선초기에까지 이어지다가 임란후 조선후기부터 성리학의 남존여비사상이 강화되면서 시집간다로 바뀌었다. 고려 이규보는 결혼에 대해 장인은 친부모와 같다고 할 정도로 아들딸 구별이 없었고 이혼과 재혼도 자유롭고 상속도 아들딸 균분상속으로 하였고 제사도 돌아가며 윤회봉사하였다. 임란후는 시집살이 노래라고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내훈에서는 시아버지에게 며느리는 당연히 효도하여야 하며 칠거지악으로 아이를 못 낳거나 말이 많은 질투 많은 여자는 강제이혼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요즘 여성의 인권은 많이 발전한 것 같다. 조선시대 시집살이는 산업혁명이후 세탁기, 전기밥솥 등으로 여성의 노동이 해방되고 여성의 투표권이 생기면서 여성들도 사회에 진출하여 그들의 능력을 보이므로써 지금은 남성들보다 월등한 실력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사회문제로 야기되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여 인구감소를 가져오는 부작용도 없지 않다. 한국도 베이비붐으로 당분간은 인구가 증가하나 인구학자는 인구절벽에 부닥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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