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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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응징을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 활동과 와해는 어떻게 전개되었나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2. 15. 04:54
해방직후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를 응징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것이 우선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민족반역자, 밀정, 앞잡이, 부일협력자 등에 대한 심판은 미군정의 미지근한 태도로 인해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야 가능했다. 이는 미군정이 행정의 공백이나 업무의 능률을 위해 이들을 관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정부수립 이후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민족반역자 처벌을 위한 법제정의 발의는 1948년 제헌국회 제 40차 본회의장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이 특별법 제정은 김웅진, 김상돈 등 소장파 10여명의 국회의원에 의해 강력히 제기되어 9월 7일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 반민족행위처벌법은 국회가 중심이 되어 친일파 처벌을 다루고, 정부는 협조자의 차원에서 머물게 되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친일관료가 주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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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해 좌우합작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는데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1. 8. 05:20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패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반격이 드세지는데다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일본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의 한반도에의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한국의 일부 지도층들은 이전부터 일본의 연이은 패전으로 해방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여운형이다. 그는 1944년 일본의 패배를 확신하면서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해방 이후를 준비했다 그리고 불문, 불신, 불명의 3대 철칙과 한국의 완전한 자유독립, 반동세력 배제,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건설을 골자로 한 조선건국동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8월15일 일본의 패망이 알려지던 날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여운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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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에 미소 강대국의 이념논리로 전개돼 분단까지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0. 31. 03:38
해방후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각기 군정을 실시했다. 따라서 자주적인 통일국가 건설은 늦춰지고 있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건설을 꾀하는 정치세력을 지원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자 했다. 그래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급히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한국인이 자주적으로 만든 그 어떤 기구도 주권기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바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은 군정을 이끌기 위해 친일경력이 있는 자본가, 지주 출신의 인사들이 군정의 행정고문이나 고위관료로 임명되었다. 반면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행정권을 각 도 인민위원회에 넘겨주고 민정부를 설치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해방 직후 미소 분할점령은 민족분단이라는 위험을 예고했다. 이러한 상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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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12.12(1979)군사 쿠데타와 5.17(1980)비상계엄으로 5공 탄생했는데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0. 28. 04:34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철벽의 유신체제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맡게 되었다. 정부는 민주화 열망을 의식하여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수감된 민주인사들을 석방시켰다.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호기가 온 것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신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10.26을 계기로 민주주의가 회복되길 바랐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유신헌법의 폐지와 대통령 직선제였다. 그러나 대통령 대행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보궐선거를 통해 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최규하의 비개혁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유신체제의 종식으로 모든 불만을 덮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 민주화는 12.12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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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단일선거는 국토 양분의 민족적 비극이라며 북으로 행했던 남북협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10. 26. 05:27
해방이후 국민의 열방은 바로 단일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 단일국가운동은 대체로 3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제1단계는 임정세력이 귀국하기 직전 국내에 남아 있었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정부수립운동이다. 제2단계는 김규식과 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 운동으로 중도통일세력 집결하에 합작 7원칙까지 합의했으나 극좌와 극우의 반대와 미소 냉전체제로 인해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제3단계는 단일선거 및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운동이었다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권행사를 계속 유지시키는 맥락에서 반탁운동의 고삐를 더욱 죄어나갔다. 이 방법이 통일의 전망을 밝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이승만은 정치권력의 장악이라는 현실문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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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되는 군사문화는 어떻게 전개되었나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9. 16. 04:56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실각한 후 3개월후간의 허정 과도정권을 거쳐 1960년 7월 내각책임제하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의 독주와 독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 한민당의 맥을 이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부 장관자리를 두고 신구파의 분란을 겪던 민주당은 가까스로 장면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장면내각은 4월 혁명 이후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를 해나가지 못했다. 무능과 부패에다 이전의 독재정치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지나칠 정도의 자유를 허용한 제2공화국은 가히 가두데모 공화국이라 할 만했다. 장면정권은 군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70만 병력을 40만으로 감축하겠다고 하는 등 대대적인 군축 조치를 취하려 했다. 그러던 중 육사 8기 출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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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경기도 편입된 한양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가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9. 15. 05:44
우선 한성부가 경기도에 편입되고 경성으로 명칭이 달라졌다. 일제는 동경이외는 다른 수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명목으로 한양을 경기도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격하시켜 조선왕조의 위상을 약화시키려 했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한양도성과 궁궐도 훼손하고 파괴되었다. 조선왕조가 힘을 잃자 북촌의 양반들도 가세가 기울게 되어 집안 물건들을 하나둘씩 가까운 인사동에 팔게 되어 골동품 판매상이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는 황토현을 없애버리고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 방면으로 길을 내어 태평로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길이 남대문까지 연결되고 굳건히 버텼던 성곽 중 남대문 양쪽 성곽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빌미가 되어 철거되었다 도성이 철거되면서 종각도 유명무실하게 되어 더 이상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닫으라고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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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동서남북 그리고 중부로 오부로 나누고 성저십리도 포함했다는데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9. 4. 05:37
한양에 도성을 축조한 다음, 성안은 5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백악산 아래 북촌, 남산 아래 남촌, 낙산 아래 동촌, 경북궁 서쪽의 서촌, 청계천 아래와 수표교 일대의 중촌이 그것이다. 그래서 당시 한양을 그린 지도를 경조오부도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한양이 오부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한양은 한성부라고 해서 도성 안과 밖 사방 10리에 해당하는 지역인 성저십리를 포함했다. 삼각산(북한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에 이르는 외사산 범위와 비슷하다. 오늘날의 서울의 범위와 거의 유사하다. 성서십리는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관리된 지역이다. 그래서 조선전기에는 사람이 얼마 살지 않았지만 후기에 가면 한양 인구의 절반 정도가 성서십리에 거주했다고 한다 성서십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어 도성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