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해방정국에 좌우합작 주도 몽양 여운형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2. 16. 03:42

    여운형은 일제시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문제 관련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고 그해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3.1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199월 상해임정이 수립시에 위원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일제의 초청으로 개인자격으로 동경을 방문하여 여러 일본지도자와 만나 조선의 자주독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29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재직하게 되어 체육청년학생에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활동을 하다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몽양은 은둔생활을 하였고 일제의 친일활동을 거절하며 지냈다. 해방전에 1944년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1945년 해방되어서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조선이 독자적으로 치안과 독립을 할 수 있도록 조직을 구성하였다. 한편 통일임시정부 수립후 이에 대해서 신탁위임통치에 대해서 우익인 비상국민회의는 반탁을 하고 좌익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찬탁을 하며 좌우갈등이 생겼다. 여기에 비상국민회의는 김규식, 김구, 이승만이 있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박헌영, 여운형이 있었다. 1946.3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가 되고 1946.6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 남한만 정부수립하고 북한에서 소련은 물러가라고 하였다. 이는 미국이 김규식을 선호한 상태에서 그는 반공주의자로 미국을 지지하며 자기를 지지해 달라는 메시지로 보였다. 이 당시 좌익인 여운형과 우익인 김규식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한 상황에서 김구는 8.15해방후 최대 성과라고 지지하고 이승만과는 정읍 발언으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공산주의자인 박헌영은 부르주아와 손잡은 좌우합작을 비판하였다. 좌우합작의 실패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활동의 역할이 컸다. 합작이 해소 못할 부분이 있는데 친일파 처벌문제와 토지개혁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미군정하의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선출에 대해 여운형은 반대하고 김규식은 찬성하였다 결정적으로 좌우합작의 실패는 어느 나라도 공산주의를 좌시 않겠다는 트루만 독트린이 1947.3월 발표되었고 이는 냉전의 시작이었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5월에 통일임시정부수립을 결렬시키고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다가 1947.7월 염동진이 이끄는 백의사 단체의 한지근 청년에 의해 혜화동 로터리에서 테러를 당하고 돌아가시고 김원봉을 위원장으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여기서 김두한이 아버지 김좌진이 사회주의자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반공투사로서 활약하여 한지근에 권총을 주어 테러하라고 지시했다고 육성녹음이 나오기도 하였다. 여운형은 일제와 해방정국에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민족지도자로 그는 오로지 조국해방만을 원했고 테러를 당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조선민족과 미소 당국자에게 호소하며 다녔고 통일을 못보고 이념극복의 투사로 남았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