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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3년 인도에 발생한 제 1차 콜레라 팬데믹은 7차를 걸쳐 현재까지 진행중이라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의학 2022. 8. 11. 07:59

    산스크리트어나 힌디어로 강가라고 불리는 갠지스강은 히말라야산맥에서 발원해 인도 북동부를 지나 마침내 뱅골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총 길이 2460km로 장대한 강이다. 힌두교에서는 갠지스강 자체를 신격화에 강변을 따라 바라나시 등 수많은 힌두교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강가의 물로 몸을 씻으면 모든 부정한 것이 깨끗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각종 생활오수와 공업용 폐수로 갠지스강 하류는 오염으로 심각하여 대장균이 엄청 발견되었고 그보다 훨씬 위험한 콜레라균도 함께 검출되었다. 수슈루타 상히타의 인도 의학서에는 탈수 증상을 일으키며 고통받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질병 바로 콜레라로 의심하는 병으로 추정하고 있다

     

    콜레라는 공기나 체액 접촉으로 감염되지 않고 오로지 보균자의 배설물로 오염된 물과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감염된다. 입을 통해 몸속으로 침투한 콜레라균은 소장에서 증식한다. 하루 정도 지나면 설사 증상이 나온다. 중증이면 심각한 구토와 설사에 시달린다. 설사는 희멀건 변을 설사하고 들척지근하고 비릿한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물처럼 쏟아지는 설사다. 이 물설사가 하루에 10리터에서 수십리터까지 쏟아지고 이는 몸무게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대량의 물설사는 콜레라균이 소장 벽을 공격하며 발생한다. 소장은 음식의 수분과 체내에서 남아도는 수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데 콜레라균 독소가 소장에서 대량의 수분을 배출하도록 자극한다. 그리고 극심한 탈수 상태에 빠지며 혈압이 떨어지고 근육경련의 증상이 나타나고 신부전이나 혼수상태에 거쳐 사망에 이른다. 콜레라의 어원도 설사 증상과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을 사람의 기본 체액으로 규정한 사체액설을 주창했다. 그리고 설사는 황담즙 이상에서 일어나고 설사증상에 황담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흐르다를 조합하여 콜레라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런 콜레라 치료는 수분과 염분을 구강과 정맥주사로 보충하는 방법으로 치료했다 최근에는 수분에 전해질이 정제된 경구수액제를 처방하기도 한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인도 등에서 국지적으로 발생하는 풍토병이던 콜레라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1817년 제 1차 콜레라 팬데믹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총 7차에 걸쳐 팬데믹이 발생했다. 이처럼 세계 확산은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한 무역활동과 1757년 벵골 토후 연합군과 맞붙은 플라시 전투 등 인구이동으로 일어났다. 역사상 최초로 콜레라 팬데믹이 1817년 인도 캘커타에서 북동쪽으로 160km쯤 떨어진 지역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삽시간에 벵골 전역과 갠지스강 유역으로 들불처럼 환산되었다. 거기에 주둔했던 영국군 3천명이 사망했다. 그 무렵 영국은 오스만제국과 교전하고 있어 콜레라를 걸린 부대원이 아라비아 반도에 상륙하게 되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콜레라는 이집트에 전염되어 하루 3.3만명이 사망하곤 했다 그러다 1823년에 수습되었다

     

    2차 콜레라 팬데믹은 전 세계적 규모로 발전해 페스트의 재래라고도 하였다. 1826년 인도 벵골지역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같은 해 동남아시아와 중국 청나라로 넘어갔다. 이후 1830년에는 러시아제국 모스크바에까지 세력을 떨쳤다. 콜레라는 저온에 강한 활동력을 유지하기에 추운 나라 모스크바에까지 갔다. 1831년에 러시아와 교전을 벌이던 폴란드 독립군 측에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고 그리고 10월에는 독일 연방 함부르크와 영국의 선덜랜드에 상륙했다. 영국에 진출한 콜레라는 영국본토를 발판 삼아 미국과 캐나다로 넘어갔고 스페인을 접수한 콜레라는 남미대륙으로 건너가 그곳을 정복했다. 이슬람교 성지인 메카에서 1831년에 1.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후 1837년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시기에 헤겔, 로제타스톤을 해독한 프랑스학자 샹폴리옹, 프로이센의 장군의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 등이 포함된다

     

    1830년대 콜레라 대증 요법은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는 감흥을 특효약으로 사용했다. 감흥은 염화제일수은의 약품명으로 설사 증상과 기생충 감염 예방 목적의 구충제로 사용했다. 이는 수은 중독을 일으킬 수 있었다. 둘째는 아편을 약으로 이용했다. 그 당시는 만병통치약으로 가격이 저렴하여 상비약으로 두루 써왔다. 그러나 중독성이 강하고 치료에 효과가 없었다. 셋째는 사혈치료로 사체액설을 바탕으로 나쁜 피를 뽑아내어 건강을 회복한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사혈은 만능 치료법으로 여겨졌다. 의학이 발전하는 1860년대 이후 사혈 요법은 미개한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인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영국의 오쇼너시가 염류 용액을 정맥에 직접 주입하는 치료법을 개발했다 이것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주류 의학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료계가 상업적으로 혼란스러운 때라 가짜 돌팔이 의사가 판치던 떄였다. 그러다가 1920년에 와서야 수분 보충이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40년대에는 경구수액제가 개발되며 콜레라 치료법이 차츰 자리 잡았다

     

    3차 팬데믹은 1840년에서 1860년 사이에 발생했다. 이때 인도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영국의 런던을 재습격했다. 런던에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으로 250만명이 초과밀지역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수 처리 시설 등의 인프라 정비 속도는 도시 과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당시 런던의 각 가정에서는 마룻바닥 아래에 오물 구덩이를 만들어두었다. 그곳에 생활하수와 화장실에서 나온 분뇨 등을 모아두었다가 구덩이가 차면 퍼내서 성벽 밖 농가에 거름용으로 내다 팔았다 1854년 런던 근처에서 젖먹이 콜레라 환자가 나왔고 그 일대에서만 콜레라로 수백명이 사망했다. 그 당시도 영국학계는 나쁜 공기탓으로 믿었다

     

    그 원인을 발견한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의 의사 존 스노였다. 그는 벽을 맞대고 한 건물에 사는 주민은 악취에 노출되는 환경에서 생활하는데 콜레라에 걸리고 누구는 안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식수 수원과 수도회사가 어디냐에 따라 콜레라 발병률이 크레 달라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공기감염이 아닌 물을 매개로 전파하는 수인성 감염병이라는 이론을 발표했다. 즉 우물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사망했고 그것은 젖먹이 아이의 소변을 담는 요강을 버린 것이었다. 그는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역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이후 영국 런던은 하수도에 투자하여 악취가 사라지고 식수도 청결하게 되어 1886년 이후 런던에서 콜레라 집단 발병이 사라졌다. 현재 가치로 2.5억 파운드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정비한 런던의 하수도 시스템은 오늘날 런던 하수 처리 시스템의 근간이 되었다

     

    4차 콜레라 팬데믹은 1863년에서 1879년까지 유럽, 중동,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을 휩쓸고 지나갔다. 감염지역만 보면 역대 최대 규모의 팬데믹이라 할 수 있고 제 5차 팬데믹은 1881년에 시작하여 189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두차례 팬데믹 모두 인도에서 시작했고 전 세계로 확산해가는 중심에 이집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편 예전부터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가 유럽에 전파된 경로를 두고 두가지 경우를 생각했다. 우선 인도에서 중앙아시아, 러시아를 지나는 육로를 통한 전파다. 또 하나의 경우는 인도에서 인도양, 홍해를 거쳐 유럽에 도달하는 바닷길이다. 1865년 콜레라가 이 바닷길을 지나 유럽에 입성함으로써 제 4차 팬데믹이 발생했다. 6차 콜레라 팬데믹은 1899년부터 1923년까지 이어졌고 1961년부터 현재까지 제 7차 콜레라 팬데믹이 진행 중이라고 보고 있다. 과거 콜레라는 고전형으로 증상이 악화되어 중증화하기 쉬우나 현재 진행 중인 콜레라균은 엘토르형으로 무증상 감염자가 만호 증상도 경증에 지나지 않다. 이번에는 인도가 아닌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으로 보고 있다. 현재도 상하수도 정비가 뒤쳐진 해외 빈곤지역과 분쟁지역에서는 지금도 콜레라로 많은 목숨을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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