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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의 후원자인 메디치가와 푸거가를 통해 르네상스를 발전과정은 어떠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3. 25. 04:28

    메디치 가
    단테 신곡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저술한 지 20년 가량 지난 후에 같은 이탈리아 사람인 단테가 서사시 <신곡>을 지었다. 단테가 로마의 시성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과 연옥 및 천국을 순례하는 장편 서사시 신곡은 기독교 세계를 그린 종교적인 작품이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쓰였고 또 답답한 중세의 울타리를 깨뜨려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단테의 뒤를 이은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공부하여 이를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그는 수많은 책을 수집하였다. 늙어서도 책 읽기를 좋아하여 책을 읽다가 엎드린 채 죽었다. 소네트(14행시)라는 독특한 시형을 창조한 그는 사물을 자유롭게 자유롭게 생각하려 하였다. 독일의 청년 운동 가운데 반더포겔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도보 여행을 하면서 자연과 조국을 이해하려는 운동이다. 이 반더포겔의 창시자가 바로 페트라르카다. 페트라르카의 제자 복카치오는 세계 최초의 소설로 치는 <데카메론>의 작자로 유명한다. 이 소설 속에서는 점잖은 성직자도 알몸을 드러낸 한갓 약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천지창조(미켈란젤로)

    <신곡>이 종교세계를 그린 것이라면 <데카메론>은 인간세계를 그린 것이라 하여 인곡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단테와 페트라르카 및 복카치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의 시각으로 사물을 자유롭게 보려고 하는 기운이 14세기가부터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일련의 문화 혁신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가리켜 르네상스라 한다. 르네상스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이다. 문예부흥이라고도 번역되는데 단순히 문예의 부흥만이 아니라 사회의 개혁이요, 시대의 거듭남이며 근대의 서곡이었다

     

    르네상스의 움직임은 우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나타났다. 이탈리아는 십자군 이래로 동방 무역으로 크게 번성하였고, 동양에서 여러 가지 물자가 흘러 들어왔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의 도시는 동서 무역의 중개지로 발전했고 시민들은 뛰어난 아라비아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중에도 힘을 가진 것이 상인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재산으로 르네상스 문화의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는 12세기 이래의 공화국으로서, 길드(동합조합)의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협의회인 시뇨리아가 정권을 쥐고 있었다. 12세기에 이탈리아의 유력도시 중 하나가 피렌체는 13세기에 봉건귀족의 세력을 쫓아내고 전시민에 의한 공화정치를 실현하였다. 15세기가 되자 모직물 공업조합의 중심이며 금융업자인 부호가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 부호가 바로 메디치가였다

     

    아테네 학당(라파엘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미켈란젤로)

    전제군주와 다를 바 없는 막강한 지위를 누렸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시대는 번영과 평화로운 시대를 유지되었다. 그 밑에는 미술가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는 1440년에 학자들을 모아 플라톤 학원을 설립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학술의 중심이 되었고 고대 아테네와 어깨를 겨룰 정도의 문화중심지가 되었다. 피렌체의 경제적 및 문화적 번영은 메디치가의 번영과 투자 위에 이룩된 것이었다. 그 후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시작되는 이탈리아 전쟁(1494-1559, 55년간)에서 이탈리아는 황폐화되었고 르네상스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메디치가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중심지에 선 인물들은 개성이 넘치는 천재 예술가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도덕률로 상징되는 중세의 전통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인문주의로 나아가며 인간성 해방을 추구하였다

     

    야콥 푸거

    야콥 푸거는 아우크스부르크시의 상인이었다. 그는 처음에 직물과 향료를 다루다가 광산 경영에 착수하였다. 동양 무역에서 독일산 은과 동을 수출하여 그는 하루아침에 유럽에 대부호가 되었다. 그는 많은 액수의 자금을 신성 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에서 융자하였다. 푸거가의 지점망은 온 유럽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도 교회에서 송금할 때는 좋든 싫든 로마의 푸거가 지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면죄부를 판 돈의 송금도 다루었다. 루터에 의한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된 면죄부는 푸거가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매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곱은 1519년 신성 로마 황제 선출에도 카를 5세에게 막대한 돈을 융자하여 그가 당선되게 했고, 또 독일 농민전쟁(1524-1525)이 발발하자 영주측에 자금을 제공하여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루터는 푸거가를 도둑이나 강도보다 더 지독하다고 비난하였다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
    성경책 출판

    피렌체에서 메디치가가 르네상스의 후원자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푸거가가 또 다른 의미에서 르네상스기의 개화를 위해 힘쓰고 있을 때, 독일의 마인츠에서는 요한 구덴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창안하여 르네상스의 결실을 재촉하였다. 인쇄술이 발견되기까지 책은 한권한권 손으로 써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인쇄술은 중국 당대 초기에 발견된 목판인쇄였다. 세계 최초의 활판 인쇄술은 송대의 필승이 고안한 도제활자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금속활자의 경우 13세기 초에 고려에서 구리활자로 <상정고금예문, 1234>을 찍은 것이 그 최초다. 그러나 이와같은 인쇄술에 의한 서적은 관리와 승려 등 일부 특권 계층의 독점물이었다. 구텐베르크는 활판 인쇄술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는데 인쇄에; 프레스를 사용하여 대량으로 그리고 선명하게 인쇄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합금을 사용하여 활자를 주조하는 기술을 터득하였다. 그는 성서를 인쇄하여 지식의 보편화에 기여한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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