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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42-49년에 청교도 혁명에 찰스 1세 영국 국왕을 처형하고 크롬웰의 공화정시대가 도래하고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5. 12. 04:08

    영국에서는 절대주의 시대가 되었어도 중세 이래의 관습법을 지켰기 때문에 법을 초월한 주권이란 생각은 아예 없었고 군주도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를 이어 스코틀랜드에서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된 제임스 1(1603-1625)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영국 의회를 무시했기 때문에 국왕과 의회는 대립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왕으로 있을 때부터 왕권신수설을 받들었던 그는 1598년 자유로운 군주국가의 참된 법률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여기서 참된 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오직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군주는 법률을 제정하고 또 그것에 효력을 부여하는 자로서 법률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온갖 다른 권력은 그 권력을 국가로부터 받은 것이며 군주로 절대로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와 같은 국왕의 고압적인 태도에 대해 국회는 영국이 전통적으로 키워온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그 진정서를 무시하고 국왕의 측근에게 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그 때문에 모직물 공업의 경영자 등 부르주아가 진출해 있던 의회는 더욱 첨예하게 국왕와 대립하였다. 제임스 1세는 종교면에서도 영국 국교회이외의 모든 종교, 칼뱅파에서 카톨릭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탄압하였다. 그가 재위중인 1620년 청교도를 주축으로 하는 일행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대륙에 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유능한 상공업자 가운데는 청교도가 많았기 때문에 제임스 1세의 종교 탄압은 경제 발전에까지도 지장을 주었다

     

    그는 외교면에서도 일관성 없는 정책을 폈고, 나중에는 독일의 30년 전쟁에 개입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통풍과 신장 결석 떄문에 고통에 당하였다. 1625년에 그가 죽었을 때는 의회의 신용을 완전히 잃었고 국고도 바닥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찰스 1세가 되었다. 찰스 1(1625-1649)또한 철저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다. 그는 왕권은 마그나카르타나 의회에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전체적인 정치를 하였다. 제정이 어려워지면 관습을 무시하고 이미 폐지된 조세를 부활시켰고 일부 귀족과 대상인에게 산업상 및 상업상의 독점권을 주었으며 종교 정책에서도 국왕의 통제 아래 있는 국교를 강제로 믿게 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 사이에는 강한 불만이 일었다. 특권 상인의 독점은 중소상인에게 불만의 씨앗이었고 또 특권 상인의 길드 규제는 생산자인 기능인에게 속박이 아닐 수 없었다. 농촌의 경우에도 젠틀리의 일부와 요맨은 토지에 부당한 과세와 규제에 자연 강한 반감을 가졌다. 더구나 이와 같은 도시의 중소 상인과 수공업자 또는 농촌의 젠틀리와 요맨 사이에는 획일적인 질서를 강요하는 국교를 기피하고 칼뱅파의 흐름인 청교주의를 믿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국교를 강제로 믿게 해 국내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려는 국왕과 대립하였다. 의회는 1628년 권리청원을 왕에게 제출하였다. 마그나카르타 이래로 국왕에 대해 민중이 확보한 권리를 열거하고 있었다. 즉 의회의 결의 없이는 국왕이라 하더라도 국민에 대해 헌금과 세를 절대 강제할 수 없다는 것. 또 국민은 불법으로 체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내용으로 의회권리의 확인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그나카르타와 권리장전 등과 더불어 영국 헌정사상 중요한 기념비를 이룬다

     

    찰스 1세는 권리청원을 일단 승인했으나, 다음해에는 의회를 전격 해산하였다. 따라서 왕과 의회의 대립은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1642년에는 끝내 내란이 발생하였다. 의회측의 주요인물은 크롬웰(1599-1658)이었다 그는 당당한 체격에 이론 정연한 말솜씨로 혁명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크롬웰 밑에서 라틴어 비서로 일한 사람이 실낙원의 작자로 유명한 시인 밀턴이었다. 내란이 발발하자 크롬웰은 기병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 부대는 철기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강철과 같은 규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영국 동남부 지방 출신 농민으로 이루어진 철기군은 전원이 열렬한 청교도이기도 하였다

     

    전투는 처음에 국왕군이 유리하였다. 그러나 찬송가를 부르며 적진에 공격해 들어가는 철기군의 맹활약으로 의회군이 최후 승리를 차지하였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했으나 체포되어 1649130일 화이트 홀 궁전 앞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후 영국은 크롬웰을 행정수반으로 하는 공화정로 바뀌었다. 공화정이라고는 하나, 사실은 크롬웰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파의 강력한 군사 지배했다. 그는 1653년에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시키고 호민관에 취임하였다. 이 같은 독재 때문에 백성의 불만이 다시 터져 1658년에 크롬웰이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1660-1685)가 망명처에서 돌아와 왕위에오름으로써 왕정복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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