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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년 중국 당나라 시기에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은 어떤 인물인가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4. 23. 07:23
7세기의 동아시아는 여왕의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일본에서는 수이코 여왕 등 3명의 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당의 제 3대 황제인 고종의 황후 측천무후가 왕위를 차지해던 것이다. 측천무후는 산서지방 형주 도독으로서 목재상을 하여 부호가 된 무사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4세떄 그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제 2대 황제인 태종의 후궁이 된 후, 덕망 있는 황후로 소문이 나돌던 장손 부인을 여의고 슬픔에 잠겨 있던 태종의 총예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25세때 태종이 죽었기 때문에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야 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태자때부터 무씨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렸었던 터라 그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어느 정도에 세월이 흐른 뒤 고종은 왕 왕후를 폐하고, 무씨를 황후 자리에 앉혔다. 이때가 고종의 나이 28세, 무후는 33세였다.연상의 여인인 무후는 고종이 때로 젊은 왕 부인과 전에 사랑했던 후궁 소숙비를 찾곤 하는 데 노하여, 두 여인의 손발을 자르고 술항아리에 넣어 죽였다. 소 숙비는 죽으면서 무후는 쥐가 돼라. 나는 고양이가 되어 그 쥐를 잡아먹으리라고 저주하였다. 그후 무씨는 궁중에서 고양이 키우는 것을 엄금하였다. 본래부터 병약한 고종은 심한 두통으로 도저히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무후는 명칭만 천황이라 하여 고종을 뒷전에 앉히고 자신을 천후라 부르게 하여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였다. 무후는 왕후가 되어 고종이 죽을 때까지 29년 동안 실제로 모든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자식과 손자라도 거치적거리면 서슴없이 죽여 없앴다. 황태자 이홍은 자기의 이복 자매인 의양공주와 산성 공주, 즉 소 숙비가 낳은 딸들을 동정하여 그들을 돕는다고 해서 어머니인 무후에게 살해되었다. 무후가 낳은 아들 이현은 <후한서>의 주석을 펼 만큼 뛰어난 학자였지만 그 역시 무후에 대한 모반을 도모하였다 하여 자살해야 하였다. 이현의 아우동명인 이현이 황태자가 되었는데 무후의 소생으로 두 형보다 자질이 떨어졌다. 어머니 무후의 과단성보다는 마음이 약한 고종을 많이 닮았고 고종이 사망한 중종으로 즉위를 하게 되었다. 중종은 황제가 되기는 했으나 권한도 없었다. 중종의 황후인 위씨가 아버지를 요직에 앉히려 하다가 무후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여릉왕으로 강등되고 아우인 이단이 예종으로 즉위하였다.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하여 무후는 군신의 간청을 받아들여 자기가 황제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로 고쳤다(690) 당의 황제였던 예종 이단은 무씨 성을 하사받고 자기 어머니인 성신황제 무측전의 후계자가 되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황제가 탄생하였다. 무측천은 새 왕조를 여는데 절대적 역할을 한 승려 설회의를 총애하기도 하였다. 무측천의 반세기 시대에 무측의 정치는 가문과 귀족의 세력을 배격하고 새로운 관료를 등용하여 시행되었다. 인재 등용을 위해 스스로 문관 시험을 시행하고 무관의 과거를 창설하였다. 또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교양인, 즉 북문학사를 중용하여 서적편찬을 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치를 행하였다. 무후 자신도 풍부한 재능과 교양을 지니고 있어서 열아홉 자에 이르는 측 천문자를 제정했고 서예가로서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705년 83세의 무후는 노환으로 몸져눕게 되었다. 무후가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80세의 연로한 재상 장간지는 무거운 허리를 일으켰다. 병실은 영선궁 안 장간지는 무거운 허리를 일으켰다. 장간지는 군사를 이끌고 가 그곳에 있는 장역지와 창종 형제를 칼로 내리치고 무측천에게 퇴위를 요구하였다. 늙은 무후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신룡 원년(705)정월의 일로 2월에는 당의 국호가 부활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무측천이 죽은 것은 그해 11월의 일이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여자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측천무후는 황제 축에 끼지 못하고 중종이 제 4대 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의 영향으로 제 2의 측천무후가 되려 한 여성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중종의 아내 위씨였다. 710년 위 황후는 중종을 독살하여 자기 아들을 황제 자리에 앉히고 스스로 황태후라 칭하였다. 중종이 독살된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황족인 이융기였다. 그는 예종의 아들로서 예종은 중종의 아우로, 무후 이전에 잠시 황제자리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융기는 군사를 일으켜 위 황후를 타도하고 아버지 예종을 황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궁정 안 권력 다툼으로 당은 한때 나라의 터전마저 크게 흔들렸다. 역사가는 이러한 혼란의 원천은 여성이 권력을 장악한데 있다고 보고, 측후무후와 위씨의 사건을 가리켜 무위지화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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