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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년 동서로 로마제국이 분열하고 서로마는 어떻게 멸망의 과정을 밟았나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3. 7. 04:04
강대국 로마제국도 4세기 접어들면서 곳곳에서 말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첫째가 반란이었다. 반란의 원인은 로마 지배층의 사치와 하층민에게 부과된 무거운 세금, 하층민의 반항을 억누르기 위한 군대의 확장에 따른 것이었다. 3세기 말에는 속주 갈리아에서 바가우다에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켈트어로 투사이라는 의미의 이 반란은 갈리아 전역에 미쳤고 한때는 독립 정권이 수립되기도 했다
원래 로마의 번역은 전쟁에서 차지하게 된 노예로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노예를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되자 경제 전체가 막히게 되었다. 역으로 보면 노예를 대량으로 수입해도 그 값이 폭락하여 경제는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농업 생산을 담당하는 노예가 야만인 세계에 의존한다는 것은 곧 야만인이 로마 제국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 된다. 이 야만인에는 당연히 게르만인도 포함된다
로마에 대한 게르만족의 침입은 그치지 않았다. 3세기에는 댜뉴브강 하류에 고트인이 나타났고, 라인강 지방에는 프랑크인과 삭소니아인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단순한 무력에 의한 침입만이 아닌 개별적으로 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도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가 되면서 로마제국 영토 안으로 이동한 것은 소작인, 로마인 지주에게 고용되거나 또는 용병으로서 로마군에 편입되었다. 같은 시기에 동방으로부터는 사산조 페리시아가 로마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는 동방으로부터는 사산조 페르시아 로마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는 동방의 로마 속주의 반란을 지원하면서 아르메니아 등 속주들을 로마로부터 빼앗아 갔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4세기 내륙 아시아 유목인의 활동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아시아에 들어간 부족은 중국에 5호16국을 건설했고, 유럽에서의 훈족 이동은 게르만인의 대이동을 일으켰다. 게르만인은 로마제국에 농민으로 흘러들기도 했고 동맹 부족으로서 합법적으로 정착하여 살기도 하였다. 또한 로마 군대에서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4세기에는 로마군 사령관으로서 게르만 출신자가 많이 채용되어, 결국에는 로마군의 주력이 거의 게르만인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에 동화된 게르만인들은 지배층 가운데서도 차츰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이 날로 쇠퇴해가던 394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제국을 둘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분할하였다. 그때부터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어졌고, 다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였다.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중세말까지 1천년 동안 이어졌으나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게르만인의 침입에 앞서 로마가 동서 양제국으로 분열한 결과, 서로마가 멸망하고 동로마가 남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서방의 숙주에서는 계속되는 하층민의 반란 결과 도시는 쇠퇴했고,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가 지배하게 되었으며 귀족은 농촌에 토착하여 그 영토를 경영하였다. 더구나 인두세와 토지세라고 하는 이중 과세 의해 징세를 책임진 자작농 소유자는 민중의 반항 사이에 끼어 그 책임을 포기하고, 자기 토지를 대토지 소유주에게 기증했으며,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는 하층민도 이들 대지주의 비호 아래 들어갔다. 이 같은 대토지 소유제도(라티푼디움) 때문에 자영농이 몰락함으로써 국방과 경제의 기틀을 잃어버린 로마는 자연 쇠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에서의 도시는 여전히 건재했고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공업이 번영했으며 비록 콜로누스화하기는 했으나 자영농민이 광범하게 존재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직하는 농촌 공동체를 통해 국가에 대한 납세의무를 이행하였다. 여기서도 대지주에 의한 콜로누스화의 현상은 있었지만 서방에서 보는 것과 같은 봉건화의 길은 걷지 않았다. 이리하여 395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나뉘어 분할 지배할 수 밖에 상황이 되었다. 게르만인은 뒤이어 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옮겨 정착해 독립정권을 수립했고, 이미 봉건화되어 있던 속주의 귀족은 게르만인 지배층과 결탁하여 하층민의 반란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는 476년 서로마 황제 아우구스툴루스가 게르만인 용병대장에 의해 폐위되기에 앞서 로마의 지배권은 이미 사라진 상황이었다
로마는 유럽의 역사에 중국이 한자를 낳았다면 서유럽의 알파벳은 로마자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인이 사용하던 라틴어에서 현대 서구 여러나라들의 문자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라틴어 계통의 언어가 생겼다. 또한 카이사르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1582년 그레고리오력이 생기기까지 서유럽의 기본 달력이 되었다. 또한 로마가 유럽에 남긴 것은 지배의 역사였다. 황제는 로마와 떨어질 수 없는 밀착된 관계였다. 때문에 프랑크의 카를로스는 제위에 올랐을 때 로마 황제라 칭했고, 로마제국의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 로마법은 유스티나누스에 의해 집대성되어 후세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고, 로마제국과 결합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서 중세 유럽의 정신계를 지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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