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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그리스 묘비와 로마의 초상화는 어떤 것이 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미술 2021. 8. 13. 04:43

    헤게소의 묘비

    고대 그리스 그중 아테네의 묘비들이 발견된 것은 1870년의 일이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서 대규모 도기 공방이 밀집해 있던 곳에서 전설로만 전해져 오던 고대 그리스 묘지가 발견되었다. 대부분이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 온전하게 남아있는 묘비가 <헤게소의 묘비>가 있다. 이 묘비에는 헤게소, 프록세니오스의 딸이라고 적혀있다. 더불어 지붕이 맞대어져 만들어지는 삼각박공과 그 아래를 받치는 단순한 형태의 기둥뿐 아니라 두인물의 모습이 거의 손상 없이 남아있다. 인체에 비해서 작게 표현되어 있지만 지붕과 기둥의 형태를 이용하여 테두리를 꾸미고 그 안의 의자에 앉아있는 헤게소의 하녀의 모습은 실내의 한 장면임을 짐작하게 한다. 보통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한다면 그 기억하기 위한 초상화나 조각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고인의 얼굴보다 고인의 행동을 보여주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헤게소는 하녀가 주는 함을 왼손으로 받아들고 있고 오른손으로 그 속에서 꺼낸 듯한 무엇인가를 들고 쳐다보고 있다. 이는 보석을 들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녀는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즐겨 입었던 주름진 드레스를 입고 있다. 얇은 천이어서 다리와 팔 등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보다는 움직임이 없고 옷의 주름 역시 차분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화려하지 않다. 그렇치만 앞에 있는 하녀보다는 입체감 있게 조각되어 우아하고 기품있는 헤게소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헤게소는 샌들을 신은 발을 받침대에 놓고 있는데, 그의 꾸밈과 의자, 그리고 발 받침대 등은 모두 부유한 집의 여인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파이윰 미라 초상화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신화와 함께 로마제국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거대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권을 지배하기 위해서 보다 실용적으로 제도를 변형시켰다. 그래서 신마저 인간다웠던 만큼 로마의 많은 제도와 문화들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세계나 사후 세상에 대한 것보다는 현재의 삶이 중요했다. 그렇치만 사후 세계를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문화가 남아있던 지역에서는 두 문화가 결합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문화에서는 현세보다는 영혼인 카를 신성시했고 죽은 후에도 카가 영원히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합된 문화는 주로 파이윰 분지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파이윰 미라 초상화를 남겼다. 첫 발견은 17세기 초반으로 알려져 있고 20세기 초까지 유물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었다. 특이한 점은 미라와 함께 출토되었다. 미라라고 하면 죽은 자의 영생을 기원하면서 만든 독특한 매장 방식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라는 천으로 감싸진 시신이 황금 마스크를 쓰고 있거나 금으로 치장된 관에 들어있는 투탕카멘 황금마스크로 알고 있지만 파이윰지역에서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초상화로 나무판에 그려져 있다. 방부처리된 미라와 함께 고온건조한 이집트 토양에 매장되어 그 색이 바래지 않고 유지되었다. 폼페이와 같이 특수한 경우 외에는 남아있는 로마의 회화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 초상화들은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와 달리 화려한 관이나 죽은 이를 위한 공간도 따로 없고 화려한 부장품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집트의 장례문화만이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에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그리파

     

    로마시민의 파이윰의 초상화

    그렇다면 하필 나무관에 초상화를 그렸을까 본래 이집트에서는 투탕카멘 마스크처럼 데드 마스크를 만들었고 로마에는 죽은 이들의 얼굴을 밀랍으로 떠서 집에 전시해두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이집트와 로마의 방식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긴 하지만, 두 지역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우선 이집트식 마스크는 개인적인 특성보다는 특유의 법칙으로 도식화된 반면, 파이윰 초상화는 개개인의 특성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특징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로마의 밀랍과 파이윰 초상화가 유사하긴 하지만 로마의 경우 밀랍이 쉬이 녹고 망가져서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만드는 초상조각으로 발전하였고 이런 초상조각들은 가족들이 저택이나 정원에 전시했다는 점에서 그 쓰임이 다르다. 파이윰 초상화는 어깨 상단 부분까지만 그려져 두상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미라화된 시신을 분석해보면 파이윰 초상화에 그려진 성별이나 연령대가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이들은 머리장식이나 복식을 보면 로마의 부유층의 초상화로 추정하고 있다. 파이윰 초상화는 2세기정도만 유지되었고, 다만 나무패널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이집트 지역의 초기 기독교 성화와 현재 터키오 그리스 지역에 형성된 비잔티 문화의 성화 제작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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