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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최악의 재해로 기록된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 사태는 어떻게 되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음식 2021. 7. 22. 04:23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류는 기아와 영양부족을 면치 못했다. 농업혁명이래 1만여년이 지난도록 식량생산의 증가 속도는 인구증가 속도에 비해 더디기만 했다. 모처럼 호황과 풍작을 맞아 인구가 늘어난다 싶으면 어김없이 불황과 흉년이 닥쳤다. 자연에 의한 인구조절이었다.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는 왕조가 바뀔 때마다 전란에 휩싸였고 대대적인 기근이 발생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굶주림에 지쳐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물론 지금도 아프리카 등 지구 곳곳에서 기아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부족과 결핍은 인류의 숙명이었다. 그런 인류에게 신대륙 발견 이후 콜럼버스의 교환으로 구대륙에 전해진 감자는 신의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쉽게 잘 자났고 익히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었다. 감자는 밀보다 두배나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감자가 빠르게 구황식물의 대표로 자리잡게 된 배경이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감자를 식용작물로 재배한 곳이 17세기 초 아일랜드였다. 아일랜드는 감자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을 가졌다. 영국의 가혹한 지배 아래 빈곤에 허덕이던 아일랜드들이 감자를 주식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농업지대인 아일랜드는 산업혁명이 한창일 때 영국의 곡창지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밀,옥수수처럼 돈이 되는 환금작물은 영국으로 팔려나갔고 아일랜드의 약 40%가 감자로 연명했다. 감자로 굶주림을 면하면서 인구 압력이 거세졌다. 아일랜드가 감자가 들어온 17세기 초 200만명이던 인구가 150년 뒤인 18세기 중반에는 네배인 800만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영국이 1000만명 남짓했던 것과 비교하면 아일랜드의 인구압력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다. 식량을 한가지 작물에만 의존하면 위험도 커지게 마련이다. 아일랜드인의 효자였던 감자가 1845년 돌연 재앙으로 돌변했다. 감자가 뿌리째 썩고 보관해둔 감자까지 썩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인은 잎마름병이라는 감자 역병이었다. 특정 곰팡이에 취약한 단일 품종의 감자만을 심었는데 한번 잎마름병이 돌자 속수무책이었다. 감자 역병이 유럽 대륙으로 퍼졌지만 유독 아일랜드에서 피해가 컸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이 19세기 최악의 재해로 기록된 아일랜드의 감자대기근이다. 감자 대기근을 영국의 식민지 착취가 사태를 키운 인재였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대기근 기간에도 지주들은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밀, 옥수수 등 곡물을 영국으로 실어 날랐다. 영국은 초기에 감자 역병의 원인을 몰라 아일랜드인의 게으른 탓이거나 신의 저주라고 치부했다. 초기 대응이 늦어 피해를 가중시킨 것이다. 더구나 영국은 곡물조례에 따라 값싼 외국산 곡물의 수입도 막아 놨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벌어진 뒤에야 영국은 곡물조례를 폐지했다. 감자 대기근의 결과는 참담했다. 불과 6년 사이에 110만명이 굶어 죽거나 영양부족에 따른 각종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신대륙으로 떠난 이민자가 대기근 기간 중 100만명을 포함해 10년간 180만명에 달했다. 졸지에 인구가 1/4이 줄어든 것이다. 이민 행렬은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져 불과 60년간 550만명이 아일랜드를 떠났다고 한다. F 케네디 대통령도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Far and away'는 아일랜드 소작농들이 미국 보스턴을 거쳐 오클라호마에서 자신들의 땅을 짓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1912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다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맨 밑바닥 3등칸은 대부분 아일랜드인이고 희생도 제일 컸다. 슬픈 아일랜드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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