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합스부르크 가문이 일군 음악의 도시인 빈에 대해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6. 7. 9. 01:41

    빈은 하이든, 슈베르트,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활약한 음악의 도시로 명성이 높은 한편 숲이 도시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빈 북부의 아우가르텐공원과 중앙부를 흐르는 다뉴브강(도나우강)을 따라 형성된 일대 등 녹지가 상당히 많다. 고대에 서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인은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동유럽 게르만세력의 경계선으로 삼고 다뉴브강과 빈강이 교차하는 지역에 군대를 주둔지를 설치했다. 이것을 빈도보나라고 불렀다. 빈도보나는 북쪽 발트해 지방에서 산출된 호박이나 모피를 남쪽 지중해 연안으로 옮기는 호박의 길과 유럽의 동서를 잇는 다뉴브의 길이 교차하는 물류의 요충지였다. 게르만인은 이곳을 빈이라 불렀다. 이 도시는 3세기에는 인구 약 1-2만명의 자치도시로 발전했지만 476년 서로마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황폐해졌다. 8세기에 프랑크왕국의 카를대제는 빈 일대를 오스트마르크(동쪽의 변방)리 이름짓고 지방행정관인 변경 백작에게 통치하게 했다. 이 오스트마르크는 훗날 오스트리아의 유래가 되었다. 11세기에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자 유럽에서 중동으로 향하는 중계지로서 빈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10세기에 현재의 독일이 있는 곳에 가톨릭교회를 든든한 후원자로 삼은 신성로마제국이 자리 잡았다. 1273년에는 스위스를 본거지로 삼는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고, 5년 후 오타카르 2세를 무너뜨려 오스트리아를 손에 넣었다.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 지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빈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외지인 합스부르크가 들어와서 자치권을 빼앗아 가자 빈의 상인과 시민이 반발을 하기도 했다. 14세기에 빈은 다른 유럽도시처럼 페스트를 겪었고 많은 시민이 사망하는 재난을 맞았다. 그후 136m의 높은 탑이 인상적인 슈테판대성당과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빈대학을 건축하는 등 중부 유럽을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1438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거의 독점하면서 빈은 오랫동안 제국의 중심이었다. 황도의 지위를 얻은 빈은 중세 후기에 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톨릭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슬람 등 외부세력에 여러 차례 침략을 당했다. 13세기에는 몽골제국이 한때 빈 근처에까지 압박해 왔다. 15세기 이후에는 지중해와 발칸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오스만 제국과 자주 충돌했다. 오스만제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뒤 1529년에 12만 대군을 이끌고 빈을 포위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형 대포를 갖고 오지 못해 성벽 돌파에 어려움을 겪었다. 장기전을 우려한 오스만제국군은 겨울이 닥치기 전에 철수했다. 1차 빈공방전을 계기로 빈은 본격적으로 성벽을 강화했다. 1565년에는 페스트와 대화재를 대비하기 위해 상수도를 정비했다. 1618년에는 독일에서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각지에서 신교를 믿는 제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빈 시내에서도 신교도인과 황제를 지지하는 가톨릭교인이 충돌했다. 30년 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쇠퇴한 1683년에 오스만제국이 또 빈을 포위하였다. 오스만제국은 1차 때보다 더 많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로마교황의 요청으로 폴란드와 스페인 등 가톨릭국가의 지원군이 빈에 집결했다. 이때 폴란드 기병의 활약으로 오스만제국군은 또 다시 철군했다. 이때 오스만제국군이 철수하면서 남긴 물자 중에 커피콩이 있었다. 이것이 후에 빈에서 카페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17세기 말에는 빈의 남서쪽에 1.7제곱킬로미터 규모의 쉰부른궁전이 개축되었고 성벽은 외곽인 리니엔발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가로등이 설치되면서 밤에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도시의 치안이 크게 개선되었다

    빈국립오페라극장

    1740년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이 되고 1745년에 남편인 프란츠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독일 북부의 신흥세력 프로이센에 군사적 위협을 받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의 귀족과 부호 및 우호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연극이나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에 힘을 쏟았다. 오페라를 만드는 음악가는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 출판물의 검열제도도 완화하여 신문이나 잡지 간행이 활발해졌다. 이에 자유로운 표현활동을 추구하는 문화인이 빈으로 모여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 2세는 어머니보다 더 선진적인 계몽전제군주였다. 평상복을 입고 시내의 녹지를 산보했고 종교관용령을 반포하여 신교도나 유대교인의 활동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이로 인해 빈은 다양한 민족이 모여드는 도시가 되었다. 따라서 빈은 2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여 이는 런던, 파리, 나폴리에 이어 유럽에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18세기 말 서부의 본에서 온 베토벤이 빈에서 활약했다. 그의 교황곡 영웅의 모티브로 삼은 나폴레옹은 1805년에 빈을 점령했다. 이후 황제 프란츠 2세는 퇴위하고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다. 1804년에 성립한 오스트리아제국 황제의 지위는 유지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유럽 각국은 나폴레옹전쟁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빈회의를 개최했다. 프랑스의 왕정복구와 각국의 세력권이 정해지는 빈체제가 성립되었다. 빈체제는 유럽 각국의 왕족에 의한 보수적인 질서 회복을 도모했다 하지만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발생했고 그 여파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 빈에도 불똥이 튀었다. 시내에서는 연일 노동자 폭동이 일어났고 이를 막기 위해 출동한 군대는 빈 도심을 에워쌓다. 이후 즉위한 신임 황제는 역병의 만연 등을 문제 삼으며 중세 이후부터 존재해 온 성벽을 철거했다. 1865년에는 성벽 자리에 약 4km의 순환도로인 링슈트라세가 건설되었고 같은 시기에 빈왕립가극장(빈국립오페라극장)이 완공되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1918)

    오스트리아제국의 공용어는 독일어지만 실제로 19세기에 제국에서 사용한 언어는 매우 다양했다. 1859년에는 오스트리아제국 영내에서의 이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각지의 다양한 민족이 빈으로 흘러들어 왔다. 1890년에 약 136만명의 인구 중에서 빈에서 태어난 시민은 45%에 불과했다. 빈에서 활약한 음악가 슈베르트와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둘다 체코 출신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의 빈은 음악가 말러, 화가 클림트, 소설가 호프만 등 쟁쟁한 문화예술인에 의해 세기말 로마라 불리는 문화조류를 창출했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훗날 독일과 소련의 지도자로서 충돌하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동시에 빈에 체류하고 있었다 당시의 빈 시장 카를 루에거는 빈에 다민족이 혼재하는 상황과 재무에 뛰어나다는 이유로 합스부르크가가 유대인을 관리로 중요한 사실에 불만을 품고 배타적인 반유대주의를 강하게 주장했다. 청년기의 히틀러가 루에거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일설에는 빈의 미술대학 입시에서 떨어져 유대계 예술가에게 반감을 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차 세계대전 종결 후인 1918년 오스트리아는 공화정으로 이행했고 합스부르크가는 약 600년에 걸쳐 누려왔던 빈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왔다. 1938년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 등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1955년 점령군이 물러나자 동서 양 진영의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영구 중립국을 선언했다. 그리고 40년 후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풍요로운 문화가 발전한 빈에서는 현재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생활하고 있다. 음악의 도시이자 숲의 도시인 빈을 찾는 발길은 전 세계에서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