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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테스탄트 상인이 만들어낸 무역도시인 암스테르담에 대해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6. 3. 26. 01:48

    네덜란드의 특색이라고 하면 국토의 1/4이 해발 0미터 이하라는 점이다. 토지가 해발 0미터보다 낮으면 물난리가 나기 쉬워 옛날부터 네덜란드는 자주 홍수의 위험에 시달렸다. 그래서 홍수 대책으로 만든 것이 개방형 하굿둑과 강물을 막는 방조제다. 암스테르담이라는 지명도 홍수를 막기 위해 건설된 암스텔강을 막는 댐에서 유래했다. 현재 네덜란드의 명물이 된 풍차도 홍수 대책에 도움이 되었다. 원래 밀을 탈곡하기 위해 독일에서 도입한 풍차를 토지에 침입한 바닷물을 배수하는 동력원으로 활용한 것이다. 풍차는 국토를 넓히느네 데에도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호수와 늪을 메워 간척지를 만드는데 한몫한 것이다. 스키폴국제공항과 암스테르담 교외에 있는 베임스터르 간척지는 풍차를 이용한 덕분에 조성할 수 있었다. 한편 원래 암스테르담은 에이설호로 흐르는 암스텔강 하구에 위치한 작은 어촌이었다. 이 도시에 1287년에 홍수로 에이설호이 넓어져 북해와 이어지자 무역거점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북유럽의 경제권을 지배하던 도시연맹인 한자동맹과 무역활동을 하며 번성하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 암스테르담은 한층 더 발전을 이루었다. 1581년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수도가 된 데다, 1585년에 브라반트공국의 국제적 상업거점 앤트워프가 스페인군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상공업자들이 거기에서 이주해 오자 그전까지 북해와 발트해 부근에 한정되어 있던 암스테르담의 상업권이 지중해 주변까지 미치게 되었다. 당시에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1580년에 가톨릭국가인 스페인이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의 상선을 리스본에 입항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어떻게 해서든 자국책을 만들고자 했던 네덜란드 상인은 결국 리스본을 경유하지 않고 동양으로 가는 독자적인 무역항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스페인의 조치가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세계 진출을 가속화한 셈이다

    암스테르담은행(유대계 자본)

    1602년 네덜란드는 동양국가들과 독점적으로 무역을 하는 동인도회사를 세웠고 1621년에는 신대륙과 무역을 하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모두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네덜란드는 다른 가톨릭국가들과 달리 무역활동에 선교를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이것이 시장개척에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외국과의 무역을 제한하던 에도시대의 일본과 계속 거래할 수 있었던 것이 그 한 예이다. 암스테르담의 상공업도 규모가 확대되었는데 그 계기는 15세기 후반 스페인에서 발생한 유대인 박해 때문이었다. 박해를 받은 유대인은 프로테스탄트가 많이 거주하고 비교적 종교에 관용적인 암스테르담으로 앞다퉈 이주했고 정착 후에는 다이아몬드 가공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했다. 이들 덕분에 암스테르담에서는 상공업이 한층 더 발전했다. 1609년에는 유대인도 출자에 참여한 암스테르담은행이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자금조달이 순조로워져 네덜란드 상인이 무역활동을 더욱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17세기 초에 암스테르담은 든든한 자금을 배경으로 무역활동을 벌이며 대표적인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영국 네덜란드전쟁과 프랑스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이후 1795년에는 프랑스혁명군의 침공을 받아 연방공화국이 붕괴했고 수도를 헤이그로 삼은 바티비아공화국이 세워졌다. 1806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한 네덜란드왕국이 수립하면서 바티비아공화국은 해체되었다. 루이의 통치하에 수도는 헤이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졌다. 이후 헤이그에는 궁전과 의사당, 각국 대사관이 설치된 한편 암스테르담은 경제의 중심 도시로 현재까지 이르렀다. 1810년에는 나폴레옹이 루이를 페위시키고 네덜란드를 프랑스제국의 속국으로 삼았다.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 각국은 빈회의에서 새로운 유럽의 질서에 대해 논의했고 그 결과 1815년에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서 독립을 이루었다. 1830년에는 연합의 한 부분이었던 벨기에가 분리 독립함으로써 현재의 네덜란드왕국이 확립되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자 암스테르담에도 산업혁명의 파도가 밀려와서 도시의 무역과 공업이 재개되었다

    현대 암스테르담은 시가지가 부채꼴로 퍼져 있다. 부채의 중심 부분에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이 있다. 그 바로 북쪽에 에이설강을 건너는 페리 승강장이 있고, 남쪽에 암스테르담의 중심인 담 광장이 있으며, 광장의 서쪽에는 네덜란드왕실의 왕궁이 있다. 이 지역을 센트럴지구라고 한다. 구시가지의 운하지구가 센트럴지구를 에워싸고 자리하고 있고, 거미집처럼 흐르는 운하를 따라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도시 내의 무수한 운하가 흐르고 있어서 암스테르담은 북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다만 두 도시의 기반은 다르다. 베네치아의 지반은 석호인 것에 비해 암스테르담은 이탄지다. 이탄지란 식물이 완전분해가 되지 않아 생긴 흙(이탄)이 쌓여 형성된 연약한 토양이다. 구시까지 운하지구의 건물은 이 이탄지에 나무말뚝을 박고 그위에 세운 것이다. 이 운하지구에는 암스테르담의 황금기에 건설된 삼대 운하가 동심원 모양으로 흐르고 있다. 운하는 원래 방어와 치수를 위해 만들었는데 이후 상업과 서민의 여가생활에 활용하고 있다. 현재에는 운하에 하우스보트를 띄워 배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하우스보트의 수가 무려 2500척에 달한다. 운하지구 주위에는 환경정비에 따라 형성된 도시확장계획구역이 있다. 19세기 당시 인구 과밀현상으로 위생환경과 주택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에 교외에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를 만든 주택지를 새롭게 건설했다. 현재도 이주민에 대응하기 위해 에이설강의 인공섬이나 암스테르담 북부, 서부, 동부에 공동주택을 지어 뉴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즉 암스테르담은 오랜된 지구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으로 계속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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