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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대제가 건설한 유럽으로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해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6. 1. 6. 01:18


내륙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러시아에서 18세기에 새롭게 조성된 항구도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럽문화를 동경하는 황제의 꿈이 담긴 뉴타운인 셈이다. 이 도시의 궁전과 교회는 표트르대제가 초대한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다. 20세기 이후 모스크바가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도시는 지금도 제정시대의 정취가 풍긴다. 이 도시는 20세기에 레닌그라드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게르만어 부르크와 슬라브어 그라드는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의미한다 개명은 외국과의 관계와 정치체제의 변화를 반영한다. 러시아 영토에서 발트해로 통하는 핀란드만 일대는 유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바닷길의 관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지역이다. 9세기에 이 지역은 노브로로드공국 건국의 중심지였고 후에 모스크바공국의 세력권으로 흡수되었다. 1617년에는 이 지역을 스웨덴이 점령했는데 18세기 초에 표트르대제가 탈환했다. 그는 유럽의 선진 공업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고 네덜란드에서 배를 만들고 군함을 조종하는 방법을 배운 적도 있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처럼 유럽으로 통하는 연안부에 무역항을 가진 도시를 만들어 수도로 삼고자했다.


계획 실현을 위해 우선 1703년 네바강 하구에 위치한 자야치섬에 요새를 만들었다. 이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작이었다. 페테르는 그가 수호성인으로 삼았던 그리스도교의 성 베드로를 가리킨다 이곳은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반기를 들었던 황태자 알렉세이가 수감되었고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레닌 일행이 갇히기도 했다. 이 도시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650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연간 평균기온은 모스크바와 비슷한 섭씨 약 5-6도다. 위도가 높기 때문에 평소 5월 하순부터 7월 중순은 백야가 이어져 한밤중에도 해가지지 않는다. 시내를 흐르는 네바강은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갈라진다. 수면이 도시 총면적의 10%를 차지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베네치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배 운항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19세기까지 하구에는 상설 다리가 없었고 작은 배나 간이 부교를 사용했다. 겨울철에는 얼어붙은 물 위를 걸어서 건널 수 있다. 하지만 도시 해발 1.5m미만에 위치하기 때문에 가을에 강풍이 불면 높은 파도가 일어 홍수피해가 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바다와 직접 맞닿은 다른 지역을 찾자니 북극 방면뿐인데 이쪽은 겨울철에 얼음으로 막혀 배 운항이 곤란했다.

겨울궁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표트르대제는 새로운 수도의 건설을 위해 약 4만명의 농노와 약 3천명의 직공을 동원하여 요새뿐만 아니라 조선소와 관청시설도 만들었다. 시가지는 많은 섬과 모래톱으로 중간중간 끊어졌다. 네바강 연안에 있는 해군성부터 주요 도로인 넵스키 대로를 시작으로 방사상으로 길이 펼쳐진다. 1712년 도시개발이 끝나자 수도를 옮겼다. 그의 명령으로 많은 귀족과 시민이 이주했고 천도한 지 10년 정도 지나자 인구가 10만명으로 증가했다. 바로 앞 코틀린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러시아제국 해군의 주력이 되는 발트함대의 모항으로 만들었다. 무역항에서는 모피나 아마 더 나아가 곡물이나 석탄을 활발하게 수출하여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서구의 공업제품이나 기호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1715년부터 시내에 서부에 페테르고프궁전(여름궁전)을 건설했고 1754년 겨울궁전을 완공했고 현재는 에르미타주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에르미타주는 은둔지를 의미하는데 원래는 예카테리나 2세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던 별궁을 지칭했다. 이 미술관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 등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그가 즉위한 지 100주년이 된 1782년 겨울궁전의 서쪽에 표트르대제의 청동기마상이 세워졌다. 시인 푸시킨은 청동의 기사라는 서사시를 썼다. 19세기 전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구는 22만명으로 1/3은 군인과 관료였고 프랑스혁명 시기 프랑스 귀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어가 상류계급의 교양어로 보급되었다. 181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이 세워졌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유럽의 학술과 사상이 확산되었다.


19세기 전반에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에 의해 로마풍 고전양식의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이로써 지금의 거리가 거의 완성했다. 1833년에 우편제도가 처음 시작되었고 그 뒤에 이어 가스등이 보급되었다. 또한 철도가 개통하여 근대적인 도시 인프라가 정비되었다. 1862년 창설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은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를 배출했고 도스토예프스키도 활동했다. 20세기 접어들어 인구는 143만명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1905년에는 곤궁에 처한 민중이 겨울궁전 앞에서 황제 니콜라이 2세에 불만을 품고 시위를 했고 1천명 이상 사망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대한 적대감이 퍼져 도시의 이름을 러시아식 페트로그라드로 바꾸었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 공산당 정권인 소비에트연방이 수립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처형되었고 1613년부터 시작되어 약 300년간 이어간 로마노프왕조가 끝났다. 러시아제국이 해제되자 페트로그라드보다 서쪽에 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이 분리 독립했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재점령했다. 이에 유럽이 재침공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러시아로 이듬해에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다. 1924년에 러시아혁명을 이끈 레닌이 사망하자 도시의 이름을 또 바꾸어 레닌그라드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1941년에 독일군이 침공해서 약 900일에 걸친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때 독일군의 완전 봉쇄로 생활에 필요한 물자보급이 끊어져 사망한 시민이 80만명이고 약 64만명이 아사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991년 소련의 공산당 정권이 해체된 후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다만 시가 속한 주의 이름은 그대로 레닌그라드로 남았다. 소련 붕괴 때 발트 3국이 다시 분리 독립했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발트해 안에서 무역이 거점이 되었다. 21세기인 현재 모스크바는 초고층빌딩이 들어선 현대적인 상업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8-19세기의 풍경과 정취가 감도는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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