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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문화가 혼재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 인도 델리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5. 12. 9. 01:29

     

    < 7개의 도시로 불리는 델리 >

    역삼각형 모양의 인도아대륙 북부 중앙에 위치한 델리는 동쪽으로 갠지스강의 지류인 야무나강이 흐르고 서쪽과 남쪽은 아라발리 구릉지대로 둘러싸인 델리 삼각지 지역에 있다. 이곳은 인도아대륙의 서부를 흐르는 인더스강과 동부를 흐르는 갠지스강 물줄기의 분기점에 해당한다. 또 옛날부터 서쪽의 아라비아해, 동쪽의 벵골만, 북쪽의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21세기 초 현재 델리의 면적은 약 1,484이고 인구는 약 3천만으로 규모 면에서 전 세계의 도시 중 5 손가락에 든다. 광대한 델리 지역에는 13세기 이후 델리 술탄왕조라 불린 5개의 왕조가 각각 왕성을 지었다. 16세기에 성립한 무굴제국 시대에는 북부에 왕성을 건설했고 영국 식민지 시대에는 동남쪽에 신도시 뉴델 리가 건설되었다. 이 일곱 개의 왕조가 각기 다른 시대에 델리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도시 개발을 했기 때문에 델리는 다면적인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델리는 7개의 도시 혹은 15개의 마을로도 불린다. 인도에서는 6세기에 굽타왕조가 멸망한 후 힌두교를 믿는 라지푸트인에 의해 북부의 소왕국들이 분립되었다. 델리라는 지명은 8세기에 그 지역을 지배한 군주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이슬람문화를 들여온 왕조 >

    1206년 투르크계 이슬람 신도였던 아이바크 장군이 인도 북부를 지배하며 델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는 아이바크를 포함한 역대 왕이 노예전사 출신이어서 노예왕조로 불린다. 아이바크는 델리 정복을 기념하며 쿠트브미나르(승리의 탑)를 건설했다. 높이가 약 72m나 되는 이 탑의 표면에는 코란의 문구를 새겼다. 당시 델리에는 힌두 사원이 27곳 있었는데 아이비크는 그 사원들을 파괴하고 그 곳의 석재로 모스크를 건설했다. 쿠트브미나르의 바로 옆에는 4세기 굽타왕조 시대에 건축된 높이 7m의 철기둥이 있다. 이는 순도 99%이상의 철로 만들어졌는데 고대 인도의 금속가공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첫 번째 델리 술탄왕조인 노예왕조의 성립 이후 320년간에 걸쳐 할지 왕조 등 흥망을 거듭하였고 모두 이슬람 왕족이 힌두교도를 지배하는 체제여서 이 무렵에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힌두교 건축물은 신상 등 장식이 많은 것이 특징인 반면 우상 숭배를 부정하는 이슬람교 건축물은 종교색이 강한 조각상은 만들지 않고 기하학 문양으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델리 술탄왕조 시대를 거치며 델리는 힌두건축과 이슬람건축의 요소가 혼재한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랄 킬라
    자마 마스지드(모스크)

     

    < 무굴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붉은 성 >

    16세기 중앙아시아 대부분은 지배하던 티무르왕조의 후손인 바부르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땅에서 군사를 이끌고 델리를 침략했다. 로디왕조를 정복한 바부르는 1526년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이라는 왕조명은 몽골에서 유래했다. 바부르의 부계 조상인 티무르는 몽골제국을 섬겼던 이슬람교 무인이고 모계 일족은 칭기즈칸의 차남 카가타이의 후손이다 한편 1628년에 즉위한 5대 황제 샤자한은 델리의 북동부에 새로운 수도 샤자한나바드를 건설했다. 이곳은 현재 델리 시내 북부의 올드델리 지역에 해당한다. 또 샤자한은 아무나강 부근에 남북 약 900m 동서 약 500m 넓이의 부지에 왕성을 건축했다. 붉은 사암을 사용했기 때문에 붉은 성이란 뜻의 랄 킬라라고 불린다. 황제와 신하가 접견하는 다와니암이라는 큰 궁정에는 고가의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치장된 공작 옥좌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도시는 왕성을 중심으로 반경 약 2km의 부채꼴 모양의 펼쳐졌고 11개의 문이 있는 6.4km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시내의 중심에서 약간 남쪽에 있는 자마 마스지드는 인도 최대의 모스크 중 하나로 1만명 이상의 예배자를 수용할 수 있다. 또 시내에 1730년까지 100개의 모스크가 신설되었다고 한다

    무굴제국 회화
    타지마할 묘

    < 무굴제국 문화와 마라타전쟁 >

    19세기 초 무굴제국 시대 델리의 인구는 대체로 13만 내외로 추정하고 이 무렵 힌두교 주민은 이슬람교 주민보다 조금 더 많았다. 무슬림인 왕후, 귀족과 고급관리는 인도 토착 힌두어가 아니라 사파비왕조와 같은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그래서 페르시아어로 쓴 시와 같은 문학작품도 많았다. 무굴제국의 지배계급은 델리에 번영을 가져왔지만 인도 토착민들 입장에서 보자면 외지인이었다. 샤자한은 델리 이외 지역에서도 대규모 건축사업에 힘을 쏟았고 특히 아그라에는 왕비 뭄타즈 마할의 영묘인 타지마할을 건설했다. 당시 건축사업에는 페르시아에서 초빙한 기술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인도 동부의 벵골 지방은 조금씩 영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영국은 1600년에 반관반민의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향신료, , 면 등의 교역이권을 확대해 나갔다. 18세기에는 인도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지방 영주의 실권을 빼앗고 징세권까지 얻어냈다. 델리의 남쪽에 펼쳐진 데칸고원 일대에서는 마라타동맹이라는 힌두교도의 독립세력이 영국군과 자주 충돌했다. 결국 1803년에 마라타동맹과 영국군 사이에 2차 마라타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영국군은 델리를 점령하여 왕성의 북서지역에 주둔지를 만들었다

    < 영국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뉴델리 >

    1857년 대규모 반영운동인 인도 대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영국군은 이를 제압하고 인도 전역을 식민지화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델리는 황폐화되었지만 영국인 거류지와 철도역이 건설되고 도심 서쪽에 새 병영지구인 델리군사지역이 조성되었다. 영국은 벵골만과 접한 캘커탕 총독부를 설치했다. 이는 인도 동부에 치우쳐 1911년 새로운 수도 뉴델리를 건설했다. 1931년 완공된 뉴델리는 영국의 대규모 계획도시다. 중심가인 코노트 플레이스부터 방사형으로 직선의 거리가 펼쳐지도록 했고 처음부터 하수도를 완비한 위생적인 환경에 공을 들였다. 또 녹지를 많이 조성한 것도 특징이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후에는 행정상의 수도 기능은 뉴델리에 집중되었다. 뉴델리는 올드델리와 함께 델리수도권이라는 지방행정단위에 포함되어 2002년 이후부터는 인도의 수도를 델리라고 표기하고 있다. 인도 독립에 즈음해서 무슬림이 많이 사는 서부지역과 벵골 지방은 파키스탄(이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리)이라는 국가로 인도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때 파키스탄에 편입된 지역에서 살던 힌두교인이 델리로 대거 몰리들면서 델리의 인구는 약 40만명 정도가 급증했다. 델리는 이 일로 1951년에는 힌두교인이 전체 인구의 84%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델리에는 현대적 고층건물 숲 사이에 힌두교 사원, 인도의 전통 종교인 자이나교의 사원, 나아가 이슬람교의 모스크와 영국인이 세운 그리스도교 교회가 혼재하고 있다. 이렇듯 델리는 다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 자리 잡았다.

    < 영국 주도로 개발된 상공업의 중심지 뭄바이 >

    아라비아해에 면한 뭄바이는 현재 델리에 필적하는 대도시로 인구는 1800만명이 넘는다. 원래는 해안에 7개의 섬이 밀집한 작은 어촌지역이었는데 1534년 포르투갈이 이곳에 성채를 쌓고 교역거점을 건설하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포르투갈어로 좋은 항구라는 뜻의 봄바이로 불렸지만 이후 영국인에 의해 봄베이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1995년 힌두교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옛 이름인 뭄바이로 개칭했다. 1661년에 영국에 양도했던 이 도시는 중동이나 유럽 방면으로 나가기 용이한 입지조건 때문에 동인도회사의 거점이 되었다. 19세기에 영국자본에 의해 방적산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1891년에는 인구 82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인도가 독립한 후에도 뭄바이는 상공업의 중심도시로 발달했다. 현재는 인도의 최대 재벌인 타타그룹을 포함한 여러 대기업의 본사, 증권거래소와 같은 중요한 금융기관이 모인 인도 최대의 경제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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