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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통해 진화한 인류아들을 위한 인문학/건축 2025. 4. 3. 02:26
피라미드의 웅장함이나 가우디 건축의 아름다운 장식을 보면 감동한다. 건축은 예술이며 부동산 자산이며 기술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축은 관계를 디자인한다는 점이다. 지구상의 다양한 생명체들은 DNA라는 설계도로 만들어진다. 그 다양한 DNA는 모두 아데닌 타민 구아닌 시토신이라는 네가지 종류의 염기로만 구성되어 있다. 네가지 염기의 조합 순서와 패턴이 바뀌면서 다양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건축도 마찬가지로 벽,창, 문, 바닥, 지붕, 계단 같은 몇 개 안되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요소들의 크기와 재료와 조합의 패턴이 다를 뿐 기본구성 요소는 동일하다. 그렇게 요소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공간은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벽은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창문은 사람 사이를 시각적으로 연결하며, 문이나 계단은 둘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관계로 만든다. 지붕은 지붕 아래에 있는 사람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다. 건축은 이렇게 관계의 망을 구성한다. 관계성은 확대하여 내부와 외부 그리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로 된다. 호모 스타디움은 공간 인간을 말한다
유발 하라리 교수는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경쟁 종을 물리치고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이 된 이유는 사피엔스가 집단의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집단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공통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곰은 우리의 선조라는 단군신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사회의 동질성을 위해서 역사를 이용하는데 외부와의 전쟁사를 교육함으로써 우리의 동질성을 일깨운다. 인간은 노래를 통해서 아니면 태극기 같은 상징적 이미지로 공동체 의식을 만든다. 현대사회는 각종 프로 스포츠를 통해서 외부에 적을 만듦으로써 내부 사회를 규합한다. 국가의식 고양을 위해서는 월드컵과 올림픽이 있다. 서로 협업하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역사 이야기, 음악, 그림, 스포츠 등이 사용되었다. 그 이외에 공간이 있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건축 공간은 사회를 이루는데 중요한 요소다. 가족이 하나 되는데 집이 필요하다. 그 외에 건축공간으로 야구장, 운동장, 공항 등의 건축 공간이 지구촌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집단의 블록들은 건축물이 만드는 공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자동차, 비행기, 스마트폰은 인간이 공간을 축소 확대 및 변행해서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다. 이렇듯 우리는 사물과 동맹을 맺으면서 자신의 시공간을 확장한다
인간과 건축 공진화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요소는 기후적 제약이다. 인간은 기후가 주는 환경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건축물을 만들었다. 그 건축은 다시 인간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고 그 사회 속에서 변화된 인간들은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통해서 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를 이용해서 새로운 건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건축은 또 다시 진일보한 인간 사회를 만들었다. 과거 인간은 돌을 다루는 기술로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그 다음은 철을 다루는 기술로 철근콘크리트 빌딩 숲의 도시를 만들었고 다음은 전자를 다루는 기술로 인터넷 가상공간을 만들었다. 인간은 새로운 기술 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을 통해서 진화해 왔다. 건축물이 사회를 진화시켰다는 생각은 인간은 사물과 동맹을 맺은 상태로 나아간다는 사조와 연결된다. 우리는 컴퓨터, 스마트폰, 자동차, 비행기라는 사물과 동맹을 맺어간다. 따라서 현대의 많은 도시는 로마를 흉내 내서 상수도를 만들었고 런던을 흉내 내어 도심 속 공원을 만들었고 파리를 흉내 내어 직선의 도로, 가로수, 지하 하수도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시 공간 구조는 사회를 새롭게 조직한다. 현대인은 그런 도시 공간 시스템과 동맹을 맺으면서 진화한 인류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인간의 실질적인 조정자는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고 인간은 DNA가 기생하는 숙주일 뿐이라고 한다. 인간은 부족한 유전자를 보완할 수 있는 이성을 만나서 업그레이드된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만들려 한다. 자연은 이들의 유전자 조합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서 암수 두 종류의 성을 만들었다. DNA는 이종교배를 통해서 숙주를 계속 진화시켜 왔다. 인간과 건축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DNA고 건축이 숙주라고 볼 수 있다. 동굴에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마천루 건물로 각 시대에 맞추어서 진화해 온 건축물들도 진화의 몸부림을 한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 숙주는 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 2만년 전에는 비, 번개, 맹수가 생존을 위협하는 조건들이었다면 지금은 집값, 도로망, 지하철 노선, 교육환경, 정치체계 등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극복하고 적응해야 하는 조건들이 되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적은 같지만 주변 환경 조건들이 바뀌면서 좀 더 복잡한 건축물들이 만들어졌다. 건축물들이 환경에 반응해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건축이 없었다면 7천만명이 한마음이 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20세기 들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고층 건물을 만든 뉴욕 같은 도시는 인구 1천만명 이상의 집단을 만들었고, 인터넷으로 만들어진 가상공간은 수십억 명의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를 만들었다. 종교 왕정, 민주주의, 자유시장 경제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이유에 의해서도 규모가 커졌지만 건축적인 하드웨어가 받쳐 주지 않으면 사회 조직은 쉽게 와해될 수 있다. 몽골제국은 건축물의 구심점이 적어 빠르게 쪼개졌고 반대로 로마제국은 건축을 잘 이용해 사회의 조직을 견고하게 했다
매너의 문화사에서 보면 예절의 일부는 본능에서 발현한다. 우두머리 앞에서 자기 몸을 작게 만들어서 덜 위협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본능이다. 그런 행동이 인간사회에서 더욱 세련되게 진화된 것이 예절 혹은 매너다. 여기에 더 큰 스케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건축공간이다.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 있는 학생보다 더 큰 사람이 되고 이를 통해서 선생님은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시점을 갖게 되고 앉아 있는 학생은 선생님을 우러러보게 되고 이는 선생님의 권위와 권력을 높이는 효과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궁궐에서의 왕도 계단을 만들어서 높은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의자를 놓고 앉는다. 신하는 계단 아래 낮은 곳에 서 있게 한다. 왕은 고개만 들면 앉은 상태에서 신하의 옆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 구조다 신하의 매너는 건축공간이 만든 것이다 본능은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강한 자와 물리적 충돌을 피하는 쪽으로 행동양식을 발전시킨다. 인체 스케일에서 만들어진 일차적 양식이 예절이고 그러한 신체 행동을 만들어주는 이차적 장치는 가구고 더 큰 스케일로 관계를 강압적으로 형성 및 유지하는 삼차적 장치가 건축물이다. 건축물은 이처럼 본능적 커뮤니케이션을 강화시키는 장치다. 이 공간인간은 빌딩 타입을 중심에 두고 건축과 사회의 관계를 시대적 흐름으로 보여 주려는 시도를 했고 건축공간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인간은 건축과 도시를 어떻게 발전시켰으며 그 건축과 도시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건축과 공간은 인간 진화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살폈다
지방도시에서 중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역대의 수도 베이징에 대해
기원전 1100년경 중국대륙에서는 주나라가 세력을 형성했고, 왕에 의해 제후로 봉해진 군주들이 각자의 영지에 나라를 세웠다. 그 가운데 현재의 베이징시 팡산지구에서는 계나라가 세워졌다. 계는 엉성퀴를 뜻하며 엉성퀴꽃이 흐드러지게 많이 피었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주나라가 쇠퇴하면서 제후들끼리 패권을 다투는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되면서 화북일대에서는 연나라가 계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영내로 도읍을 옮겼다. 그 후 연나라는 전국 7웅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성장했다. 연나라가 도읍을 옮긴 까닭은 연성이 평야와 산지가 맞닿은 교통의 요충지인 데다 수원이 확보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베이징은 현재에도 계성, 연성, 연경이라고 불린다.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전국 7웅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진나라에 멸망하고 이후 연성은 지방도시로 전락했다. 진나라 수도 시안에서 베이징 지역은 변경이다. 하지만 농작물의 생산력이 높고 북방 이민족에 대한 방어거점과 교역의 요충지로 적합했다. 이런 이점으로 베이징은 한왕조 이후에는 화북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나라 2대 황제인 양제는 610년에 황허강과 양쯔강을 남북으로 잇는 경항대운하를 건설했는데 그 북쪽의 기점이 바로 현재의 베이징이다
베이징은 동북부에 지우쳐 있고 만리장성까지 차로 한시간 거리다. 경제도시 상하이나 홍콩보다 몽골쪽이 더 가깝다. 중국에서는 수도를 나타낼 때 경자를 붙인다. 그러므로 베이징은 한자 그대로 북쪽 수도를 의미한다. 당나라 시대까지 주로 장안이나 낙양 등 황허강의 중류지역이 역대 왕조의 중심지였다. 왕조들은 보통 수도를 중심으로 그에 준하는 주요 도시를 동서남북에 지정했다. 그리고 이를 각각 동경, 서경, 남경, 북경이라고 불렀다. 역사적으로 지방도시에 불과했던 연경을 수도로 삼은 나라는 북방에서 침입해온 이민족이었다. 10세기경 북방에서 세력을 떨친 거란족이 남하하여 연경을 남쪽 수도로 삼고 남경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금나라도 남경으로 천도하고 중도로 개칭했다. 1215년 몽골군의 침공으로 중도가 함락되었고 이어 몽골제국의 5대 황제 쿠빌라이는 1267년 수도를 중도로 옮기고 이름을 대도라 정했다.
많은 몽골인에게 대도(베이징)는 처음으로 보는 대도시였다. 유목과 수렵을 생업으로 이동하며 살아온 유목민에게는 도시에서 정주한다는 개념이 없어서 처음에는 점령한 도시를 파괴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거란족의 후손인 야율초재가 쿠빌라이의 재상이 되어 산업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그의 주장대로 세수가 확보되면서 대도시의 중요성이 인정받게 되었다. 몽골고원, 만주, 중국대륙과 같이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게 된 원나라에게 몽골과 중국의 중간지점인 대도는 여러모로 수도로 적합한 도시였다. 원나라는 수도를 정비하는데 문화적으로 더 발전했던 역대 중국왕조의 건축방식을 도입했고 대도는 바깥둘레가 약 28km에 달하는 성벽으로 에워싸인 거대도시로 변모했다. 장안 등 역대 왕조의 수도와 마찬가지로 도심을 좌우대칭의 바둑판과 같은 구획으로 나누고 옥좌를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에 비유하는 식의 배치는 유교경전의 주례를 바탕으로 했다. 또 적수담에 운하를 만들어 성내로 물을 끌어들여 식수로 이용하고 수로를 통한 물자 수송을 용이하게 했다. 도성내에는 불교와 도교 사원 외에 그리스도교 교회와 이슬람 모스크도 건설했다. 이는 중상주의를 표방한 원나라의 수도에 이슬람이나 유럽 상인 등을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대도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14세기에 들어서자 원나라 각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홍건적의 난에서 두각을 드러낸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을 제압하고 난징를 수도로 삼아 1368년에 명나라를 건국했다. 주원장은 황제(홍무제)로 즉위하여 북벌을 개시했고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버리고 몽골고원으로 달아났다. 명나라는 이민족 지배에 대한 반발로 원나라 통치의 상징인 대도의 궁전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화북일대를 다스리는 연왕으로 봉해진 홍무제의 넷째 아들 주체는 대도에서 이름을 바꾼 북평을 본거지로 삼아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했다. 그러나 홍무제의 사후에 즉위한 2대 황제 건문제가 황족을 숙청하자 주체는 간신을 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주체는 황제군을 무찌르고 난징을 점령한 뒤 건문제를 폐위시켰다. 그후 주체는 명의 3대 황제(영락제)로 즉위하고 수도를 자신의 본거지인 북평으로 옮겨 북경 즉 베이징으로 개칭했다. 영락제는 몽골과 티베트 지역으로까지 원정에 나서며 명나라의 최대판도를 구축하는 동시에 베이징에 자금성을 건설했다. 비로서 한족이 세운 통일왕조의 수도 베이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 베이징시의 중심부는 영락제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성의 중심에 황제가 거주하는 자금성이 있고, 황족의 주거지인 황성이 그 주위를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황제는 북쪽에 있는 옥좌에 앉아 남쪽을 향해 정무를 보았고 그 북측에 정산이라는 인공산을 쌓아 자신의 배후를 보호하게 했다. 이 배치는 풍수사상을 토대로 한 것이다. 베이징 주변에는 다진 흙과 벽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1436년에 보수를 하여 네 모퉁이와 아홉 개의 문에 누각을 만들었다. 또 그 유명한 천안문을 황성의 입구에 세우고 법령을 공포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이 무렵 베이징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내성이 포화상태가 되자 사람들은 성 바깥으로 거주영역을 넓혔다. 그래서 영락제는 1553년부터 11년간 내성 밖을 둘러싸는 외성을 만들었다. 이후 베이징의 중심부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외성 위에 작은 사각형 모양의 내성을 얹은 듯한 형태가 되었다. 사실 당초 계획은 내성의 주위를 모두 외성으로 둘러싸는 형태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산 문제로 남쪽에만 공사를 하는데 그쳤다. 후에 내성은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외성은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이중의 도시체계에 따라 베이징은 번성했다. 내성에서는 많은 외국 사절들이 황제를 알현했고, 식당, 술집, 여관, 사원 등이 들어선 외성의 번화한 거리에는 각국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북적였다.
17세기에는 명나라 지배하에 있었던 만주의 여진족이 독립하여 후금을 세웠다. 쇠약해진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에 의해 멸망한다. 후금은 이자성을 진압한 후 베이징에 입성했고 1636년에 국명을 청으로 바꾸었다. 청나라는 중국뿐 아니라 몽골, 위구르, 티베트, 한반도까지 세력이 미치는 대제국이 되어 약 300년 동안 왕조를 유지했다. 청나라는 한족을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 베이징을 그대로 수도로 삼고 자금성도 그대로 사용했다.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에 의해 청왕조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은 처음에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사이의 내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공산당이 승리했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하면서 베이징은 다시 수도가 되었다.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국민당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같은 사회주의를 내건 소련이나 몽골과 가깝기 때문이라는 설도 떠돌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후에는 옛 성벽의 대부분이 헐리고 도로가 들어섰다. 또 내성의 성벽 아래를 빙 돌 듯이 순환하는 지하철이 부설되었다. 자금성은 고궁박물관이 되었고 천안문 앞의 건물은 헐려 천안문광장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광장의 서쪽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는 인민대회당, 동쪽에는 중국국가박물관이 세워졌다. 그 후 베이징의 영역은 더 확대되어 옛 도성을 중심으로 약 1.7㎢나 되는 엄청난 면적을 자랑하는 특별직할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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