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신을 위한 시대인 중세의 예술에 대해서 살펴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건축 2022. 10. 14. 04:34

    밀라노칙령

    고대 로마는 지중해 유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영국의 일부, 동쪽으로는 터키와 이스라엘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동유럽 쪽은 춥고 자연 기후가 좋지 않은 곳이며 야만인들이 사는 곳이라 해서 더 이상 점령하지 않고 경계선만을 구축했다. 오랜 평화 속에서 로마는 내부에서부터 곯아갔고 피지배인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그러다 동방에서 온 과격한 훈족에 의해 유럽의 북쪽 땅에 살던 게르만족이 로마로 넘어왔다. 이미 불안정한 상황이었던 로마는 힘없이 무너졌고 오랜 로마는 역사는 끝났다. 하지만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와 로마의 수준 높은 문화는 게르만족에게 흡수되었다. 비록 라틴족의 지배력은 줄어들었지만 야만인이라 불리던 게르만족이 따듯하고 비옥하며 문화적으로 풍부한 로마의 영토를 각기 나눠 점령하면서 현재 서유럽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로마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게르만족은 우수한 예술과 문화는 물론 기독교까지 그대로 흡수했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나름대로 기독교 예술을 만들고 발전시켰다. 그중 하나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1831)에 나온 성당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노트르담 드 파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노트르담이라 일컫는 파리의 시뗴섬에 위치한 대성당을 말하지만 사실 노트르담은 프랑스의 큰 도시에 하나씩 있는 대성당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각 도시의 노트르담은 시민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인 동시에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었기에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받아들인 중세 유럽 국가들의 중심적인 종교였다. 그러다 보니 왕의 궁전보다 교회를 더 화려하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인간의 욕망을 배제해야 하는 만큼, 로마시기에 표현되었던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과 회화의 맥은 모두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에 젖은 옷으로 몸의 볼륨이 드러나던 고대 조각은 경직되고 비율이 맞지 않은 인체로 변하였고 개인의 개성이 드러났던 초상화는 단순하고 도식화된 성상화로 변했다. 그렇게 회화와 조각에서 로마의 전통이 끊기긴 했지만 신에게 믿음과 소망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은 건축이 발달하게 되는 원동력으로 이어졌다. 우선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예배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규모가 커졌다. 그리고 하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서도 하늘의 빛이 더 많이 실내에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더 얇고도 높은 벽을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스테인드글라스도 설치해야 했으므로 건축공법과 자재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노트르담의 장미창처럼 화려한 색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교인들에게 마치 천상의 빛처럼 느껴진다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

    이렇게 지어진 중세의 성당은 로마의 건축과 외형부터 달랐다. 얇은 벽으로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 바깥쪽에 벽을 받치는 구조물이 붙었는데 이는 마치 동물의 갈비뼈처럼 보였다. 빗물받기에 조각한 괴수상은 기괴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실제 이런 괴수상은 동물의 형태를 옷과 무기 등에 장식하던 게르만족의 전통이 중세식으로 해석된 것이었다. 그 결과 중세 서유럽의 성당 모습이 마치 게르만족 중 하나인 고트족의 것과 같이 기괴하다고 해서 고딕 양식이라고 부렀다. 이처럼 중세는 어떤 시대보다 철저하게 유일신 하나님을 위한 기독교 예술이 빛나던 시기다. 모든 예술품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왕과 귀족 역시 자신의 궁전이 아닌 교회를 위해 돈을 써야 했다. 심지어 이는 예술뿐 아니라 모든 생활 영역으로 이어졌다. 언제든지 종교의 이름으로 심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인간이기에 느낄 수 밖에 없는 감정과 욕망은 분명 존재하고 이를 음지에서 그런 욕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