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 안 최고의 재벌이 된 불교 사찰에 대해서아들을 위한 인문학/종교 2024. 9. 20. 03:13
불교는 기원전 5-6세기 무렵 고대 인도의 히말라야 산기슭(인도와 네팔의 국경지대)에서 태어난 붓다가 창시한 종교이다. 붓다는 석가모니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부처라고도 한다. 붓다는 고대 인도의 석가 족이 다스리는 작은 왕국 카필라의 왕자였다. 당시 인도에서는 브라만교(현재 힌두교)가 번영하고 있었다. 브라만교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이른바 카스트 제도이다.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귀족,무사) 바이샤(평민) 수드라(천민, 노예)등 크게 네 개의 신분으로 나뉜다. 카스트제도를 뒷받침하는 사상은 사람은 수없이 윤회와 환생을 거치며 전생의 업이 이번 생의 신분에 반영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혹독한 수행을 거쳐 해탈하면 윤회와 환생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생로병사, 희로애락 등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믿었다. 붓다도 처음에는 브라만교의 수행자였다. 수행에서는 고행 끝에 깨달음이 있다고 믿어 단식을 하거나 몸에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고행을 하였다. 그리고 고행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붓다는 수자타라는 여인의 우유를 섞어 끓인 유미죽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
고통을 통해 해탈에 이르러 인생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 이 세상에는 성도 속도 없고 사람에게는 귀천이 없다 그렇게 불교 사상이 생겨났다. 즉 혹독한 수행을 거친 자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브라만교의 사상을 부정한 것이었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었기에 급속하게 퍼졌다. 또 붓다는 사람에게는 구별이 없다는 전생의 업으로 현생의 신분이 결정되는 일이 없다라며 부라만교의 공고한 신분제도를 비판했다. 붓다는 죽기 직전에도 제자들에게 앞으로는 세상의 도리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후세의 불교는 초기 불교의 본질을 따르지 않았다. 오랜 수행 끝에 터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야 교단과 승려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후 붓다의 제자들은 교단을 만들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교리가 점점 어려워졌다. 불교의 가르침에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럴려면 교리를 엄격하고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불교도 비즈니스화가 된 것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브라만교의 확고부동한 세력에 의해 널리 퍼지지 못했다. 아소카 왕은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무렵까지 인도의 거의 전역을 통치한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이다. 아소카 왕은 붓다 사후 200년 뒤에 왕위에 올라 당시 신흥 종교였던 불교에 입신하여 교단을 보호했다. 아소카 왕의 보호 덕분에 불교는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런데 아소카왕은 불교외에 브라만교 자이나교 등 모든 종교를 존중했다. 이는 이복형제 100명 죽이면서 왕위를 지켰고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몇 만명을 학살했다. 자신의 잔혹한 행위에 깊은 회한을 느끼고 속죄하기 위해 각종 종교를 보호했다고 한다 아소카 왕의 종교 정책은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과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된 요인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불교에서는 엄격한 수행을 강조하고 어려운 교리를 익히기를 요구한다. 이 모순은 불교와 브라만교를 뒤섞어 하나로 만든데서 생겨났다고 본다 또한 이 모든 종교에 관용적인 정책 때문에 결국 인도지방에서 불교는 브라만교에 흡수되었다. 그 결과 불교는 인도에서 쇠퇴하게 된 것이다
불교세력은 나라시대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국가의 정치경제의 중추를 잡은 특권계급이 되었다. 당시의 사찰은 재물은 물론이고 무력도 보유했다. 더구나 치외법권적 권리까지 누리면서 그 광대한 부지내는 독립국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사찰 내에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많았다. 고대부터 귀족 가문에서는 후계자 다툼을 피하기 위해 가문의 상속자가 아닌 차남이나 서자들은 출가시키는 일이 흔했다. 유럽에서는 차남 등이 성직자가 되었다.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들은 거액의 금품이나 장원 등 집안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이것이 다시 사찰의 세력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사찰에 대해서는 정권조차 엄하게 간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무로마치 시대부터인 1336년부터 1590년 전국시대 전반까지 일본의 자산은 대부분 사찰이 소유하고 있었다. 전국시대 일본의 8대 재벌의 절반이 사찰이었다고 한다. 승려들은 비단옷을 입고 금장식의 검과 단검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재벌이 된 것은 신자들의 기부와 장원을 이용해 대부업도 겸해서 돈을 불렸다고 한다.
'아들을 위한 인문학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터 금지령 때문에 불붙은 종교개혁 (2) 2024.12.05 수로 하나 때문에 400년간 싸운 종파인 이슬람교에 대해 (0) 2024.11.19 세금을 두고 국가와 권력 다툼을 한 종교인 개신교에 대해서 (11) 2024.07.23 신의 이름으로 비즈니스를 하다 (1) 2024.05.14 4천년 전의 모세의 십계명과 유대교는 어떻게 박해와 함께 발전했나 (1) 2024.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