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세금을 두고 국가와 권력 다툼을 한 종교인 개신교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종교 2024. 7. 23. 03:12

     

    가톨릭 교회는 풍부한 자금을 이용하여 거대하고 호화로운 교회를 각지에 세웠다. 프랑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물론 유럽의 시골에도 성에 버금가는 교회가 있다. 대부분이 교회의 십일조로 만들어졌다. 가톨릭 교회의 막대한 재산은 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성직매매가 기승을 부렸다. 그래서 주교 같은 교회의 요직은 대부분 귀족의 자제들이 차지했다.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주교는 부와 명성을 얻는 좋은 수단이었다. 일반 시민이 주교 자리까지 오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당시에 장남이 집안을 물려받는 일이 거의 상식으로 통했기 때문에 차남 삼남을 교회로 들여보냈다. 귀족의 권력을 이용해 주교 같은 지위로 출세시켰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메디치 가문은 중세 유럽의 최대 자산가이며 예술가의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도 메디치 가문의 자금 지원으로 탄생했다. 메디치 가문은 원래 이탈리아 피렌체의 환전상이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자금관리를 맡게 되면서 급성장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는 전 세계에서 징수된 교회세가 모였고 메디치 가문은 그 막대한 자금의 관리 운영을 맡은 것이다. 이는 메디치 가문이 행실이 안좋다고 소문난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을 자금력으로 지원하여 요한 23세로 등극하므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무를 도맡았고 조반니 데 메디치는 추기경에서 레오 10세의 교황까지 올랐다. 그후 재정이 바닥난 것을 메우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 등의 교회의 형식화한 교리를 원래대로 되돌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개혁 운동 벌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기독교는 분리되어 기존의 가톨릭 교회와 새롭게 생긴 개신교 교회로 나뉘었다. 종교개혁의 원인은 면죄부 판매였다. 면죄부는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그때까지 십자군의 원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차례 면죄부를 발행했다. 16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위한 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으로 면죄부가 발행되기도 했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가톨릭 교회처럼 정해진 세금은 없고 자신이 낼 수 있는 범위에서 헌납하게 했다. 이 때문에 십일조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1521년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파면했으나 그에 동조하는 성직자와 제후도 증가해 갔다. 루터는 유대인들을 종교 개혁에 동참에 반대하자 반유대주의로 나아갔다. 이것은 훗날 나치 독일의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영국도 루터 종교개혁에 동조하여 교회세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교회세는 십일조로 4등분이 되어 일부가 로마 교황에 보내졌다 세수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헨리 8세는 1534년 영국 국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고 국왕지상법에 따라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다. 따라서 십일조는 자신에게 내도록 했다. 따라서 헨리 8세의 스페인 왕녀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는 하나의 구실에 불과로써 파문을 당했고 실제는 교회세문제였다

     

    한편 교회세 십일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나라가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대항해시대에서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으나 16세기 후반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독빌해 떨어져 나갔고 바스크 등 스페인 내란이 번번히 일어났다.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연달아 빼앗기고 말았다. 원래 스페인은 풍부한 광산과 비옥한 농지도 많았다. 스페인이 강국의 면모를 갖춘 것은 1469년 양대 왕국인 카스티아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를 결혼시켜 통합했다. 이로써 유럽의 강대국 스페인이 탄생한 것이다. 1571년에는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국가의 숙적이었던 이슬람권의 대국 오스만 제국을 무찌르면서 스페인 함대는 무적함대로 불렸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세와 내란 등으로 심각한 재정적 위기가 만성화되었고 경제 파탄마저 여러 차례 일어났다 한편 1556년 스페인의 왕위를 이은 펠리페 2세는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한 광대한 스페인령과 더불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부채까지 물려받았다. 필리페 2세는 1557년과 1575년 파산선고를 했다. 이는 전비와 교회세가 파산의 주원인으로 보고 있다. 거기에다 소비세로 재원을 보충하려다가 쇠퇴의 길로 들어갔다

     

    펠리페 2세는 소비세를 네덜란드에도 적용하려고 하자 네덜란드는 종교 개혁 이후 급격하게 개신교가 늘어나면서 스페인 국왕와 대립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568년 시작된 네덜란드 무장봉기는 80년 가까이 이어졌고 이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라고 하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으며 네덜란드 독립 승인으로 끝났다. 또한 소비세를 부과한 것에 대해 1640년 포르투갈도 무장봉기가 일어나 이 전쟁도 28년간 이어졌고 최종적으로 포르투갈이 독립이 되었다. 스페인의 소비세는 거래때마다 부과하는 최종적 세금이 아니어서 상품의 가격은 점점 더 올라갔다. 세수는 늘었지만 물가는 올라가고 경기는 침체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물가 상승이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은이 유입되었다고 하나 그 이전부터 물가 상승은 이어졌다고 한다. 스페인 국제수지가 악화되었고 세금을 면죄받는 귀족들도 크게 늘게 되었다. 귀족도 살 수 있고 이를 통해 세금을 내지 않았다. 이는 로마제국의 말기에 비슷한 상황이다. 스페인 왕실은 재정이 계속 악화되어 스위스 등의 은행가에 돈을 빌렸다. 이로써 국제수지 악화는 해운업의 쇠퇴도 가져오고 무적함대의 명성도 약화되었다. 평소의 상선이 전시에 군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탄생했지만 오히려 종교가 지닌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은 더 강했다. 개신교의 잔악성이 여실히 보여주는 곳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중세부터 20세기까지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었다. 유럽 북서쪽에 위치하며 그레이트브리튼섬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아일랜드섬 북쪽의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진 국가다.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싸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싸움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세 영국은 아일랜드 북부로 이주를 권유하는 등 본국의 일부로 취급했다 그러나 정치적 의미에서 명확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16세기 후반 영국의 헨리 8세는 아일랜드 왕을 자처했지만 아일랜드의 귀족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윽고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이 원정 이후 아일랜드는 정식으로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한편 1534년 종교개혁으로 영국왕가는 개신교로 개종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전체가 개신교를 받아들였으나 아일랜드 주민은 가톨릭 신자로 남았다. 이에 대한 종교적 갈등으로 아일랜드의 수많은 사람이 죽고 토지를 영국에 몰수되었다. 아일랜드 농민들은 농지의 2/3은 밀을 심어 영국 본토에 보내고 1/3의 감자는 자국에서 먹었다. 1845년 미국에서 발생한 병해가 유럽에 번지면서 대기근이 일어났다. 주식인 감자의 수확이 40%나 감소했다. 이때 100만명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50만명이 굶어죽었다고 추정했다

     

    18세기가 되자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 등의 영향으로 아일랜드 사람들도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영국은 이러한 움직임을 막기 위해 아일랜드를 정식으로 합병을 1801년에 했다. 아일랜드의 반영감정은 19세기 말 정점에 달했다. 유럽 각지에서 독립의 바람이 불었고 아일랜드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22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일랜드는 사실상 독립을 했다. 그 뒤 1949년에는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아 아일랜드 공화국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영국은 북아일랜드는 개신교 영국이 있어 분리 독립시켜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이 되었다. 이에 반발해 북아일랜드 분쟁이 일어났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만들고 1960-1980년대까지 테러를 거듭 했다. 3천명 이상의 아일랜드인이 희생되었다 북아일랜드의 영국계 주민들도 무장조직 얼스터 의용군을 만들어 피의 전쟁이 있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1998년 평화협정에 따라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를 인정하면서 종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폭동은 간간히 일어나고 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