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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로 하나 때문에 400년간 싸운 종파인 이슬람교에 대해
    아들을 위한 인문학/종교 2024. 11. 19. 03:11

    로마제국 말기인 610년 무렵에 아랍지역에 새로운 거대 종교 세력인 이슬람교가 탄생했다. 메카의 상인이었던 무함다드는 유대교의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이슬람교를 만들었다. 이슬람교는 순식간에 중동, 북아프리카, 스페인을 휩쓸었다. 한편 이슬람교가 아랍인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는 교리를 전파한 요인은 여러 해석이 가능한 구약성경과 달리 지침이 명확했다. 이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도구였다. 또한 금주와 돼지고기 금지 같은 것은 위생환경과 사회환경을 위한 효과적인 해결방법이었다. 또 다른 매력은 세금이 적다는 것이다. 옛 로마 제국의 주민들은 과도한 세금에 시달린 것과 대조적이다. 로마지역에는 토지세와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로마제국의 국교는 기독교로 이들 세력과 결탁하여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다. 여기서 무함마드는 이슬람교로 개정하면 인두세를 면세해주었다 정복지에서도 관대한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었다. 이집트에서는 금화 또는 은화로 납부하도록 했으나 이슬람 제국에서는 주민의 형편에 맞는 물품으로 낼 수 있게 했다 더구나 이슬람교인이 가축 방목 등의 용도로 조금이라도 사용한 땅은 토지세를 면세해 주었다 이교도 상인도 불경기일 때는 인두세를 면제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같은 경전의 민족으로서 개종을 강요당하지 않았다

     

    이슬람 제국은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 급속히 쇠퇴하고 분열한다 여기에는 세금이 크게 얽혀 있다. 이슬람 제국에서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등 모든 신도의 세금이 평등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슬람교인에게는 토지세가 부과되지 않았다. 이를 본 다른 종교의 신자들은 이슬람교로 개정했다. 모두가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이슬람교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 세수가 부족하자 무함마드가 죽자 종교지도자인 칼리프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그들이 돈맛을 알면서 이슬람교는 부패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 이후의 지도자들은 관리나 군사령관에게 징세청부를 시켰다. 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제국 지방의 유력자는 자기 배를 불리느라 혈안을 되었고 중앙 정부에는 돈이 들어오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징세 청부인들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징세 청부인인 관리나 군사령관은 걷은 세금의 80%를 가지고 나머지 20%를 상납했다. 실제로 5%도 상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결과 중앙 정부의 힘이 떨어지면서 이슬람 제국의 구심력도 약해졌다. 결국 이슬람제국은 분열되었고 몽골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슬람권은 한때 분열하면서 세력이 약해졌으나 무함마드 사후 600년이 지나 초기 이슬람 제국의 성격을 강하게 계승한 대제국이 탄생한다. 바로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 튀르키예 부근의 오스만이라는 작은 호족에서 발전해 생긴 국가다. 14세기-15세기 전반에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1453년에는 비잔티움 왕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도 공략해 로마 제국의 후예를 멸망시켰다.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를 누릴 때는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부터 아랍 전체, 서아시아, 서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오스만 제국은 중세부터 근세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계 경제의 중심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서구 국가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대항해에 나선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대항해는 오스만 제국을 피해 아시아와 교역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번영했던 이유는 중세의 서구국가들이 봉건제도인데 비해 불완전하지만 중앙집권제도가 존재했다. 오스만 제국은 32개의 주가 있었는데 하나는 티마르형으로 제국에서 파견한 관료들이 징세와 행정을 맡았다. 다른 하나는 살야네형으로 이는 자치주로 제국 정부가 총독을 파견하고 군대는 주둔시켰지만 징세와 행정은 현지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9개 주가 살아네형을 택했다. 오스만 제국은 전 지역에서 세수로 거둔 풍부한 자금으로 무기를 갖추고 상비군을 길러냈다 따라서 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광대한 영토뿐만 아니라 요충지에 위치했다. 당시 동서양 무역은 중국,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육로, 이른바 실크로드와 동남아시아에서 말라카 해협을 거쳐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해상 경로가 대표적이다. 두 경로의 중앙 터미널이랄 수 있는 곳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다 이곳은 러시아 등 북방 지역의 값비싼 검은 담비 모피와 호박, 우크라이나의 곡물, 유럽의 은, 중국의 도자기,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등 각지에서 다양한 물품이 모여드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중해뿐 아니라 흑해도 오스만 제국이 차지했다. 다시 교통 기술로는 유럽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와 교역하는 일은 힘들었다. 자연시 오스만 제국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교역을 관장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로마 숫자를 사용하였지만 그런데 로마 숫자는 단위가 커질수록 XI가 여러개 표시되면 알아보기 어렵고 혼동이 되었다. 이에 비해 아라비아 숫자는 쉬게 구별되어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퍼져 순식간에 유럽에 보급되었다. 손익계산표와 재무 상태표를 나타내는 복식부기도 이슬람 상인에서 비롯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능력을 중시하여 유대인도 적극 등용했다. 유대인은 환전상 등 금융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세계적 은행가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는 7세기 메카의 상인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로 아랍 전체의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후 칼리프라는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입장차이를 보였다. 7세기 알리라는 인물이 칼리프가 되었는데 이를 따르는 사람이 시아파가 되었고 알리를 인정하지 않는 파는 이슬람의 관행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수니파가 되었다. 시아파는 10세기 무렵에 세력이 약해졌으나 16세기에 이란지방에 일어난 사파비 왕조가 시아파를 국교로 정하면서 부활했다.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대항 세력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이다. 두 국가는 사사건건 대립을 벌였는데 소규모 충돌이 영유권 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 특히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하류에 있는 사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을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다. 이 수로는 두강의 합류하는 곳으로 길이 200km로 가장 넓은 지점은 폭은 800m에 이른다. 1639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처음으로 국경선이 정해졌다. 사파비 왕조의 뒤를 이어 카자르 왕조가 등장했다. 하지만 국경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1847년 영국의 중개로 국경 확정 작업이 되었으나 사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은 오스만 제국에서 있어서 카자르 왕조는 사용할 수 없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문제는 현대로 넘어와 카자르 왕조는 이란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라크로 계승되었다 이 수로는 수에즈 운하 전에 내륙과 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통로로 중요했다. 더구나 석유가 채굴되면서 그 가치는 한층 높아졌다. 1970년 이란은 미국을 등에 업고 이라크에 국경선을 조정하라고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도 저항할 수 없었고 1975년 수로의 중앙선을 국경으로 하는데 합의했다. 이라크가 이 수로의 영유권을 절반을 빼앗긴 셈이 되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원리주의자 호메이니가 이끄는 반미 노선을 강화했다. 1980년에 이라크는 이란을 선제공격했다. 미국은 이라크 편에 섰다. 당시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지도자였다. 이란과 이라크 전쟁은 8년 동안 이어지며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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