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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대인들이 금융대부업과 무역업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4. 4. 25. 03:27

    유대인에게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으로 대표하는 교활한 대부업자라는 이미지가 씌워져 있다. 사람들이 유대인을 박해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이 금융대부업과 무역업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는 이유는 고대 로마로부터 나라를 잃은 일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나라를 잃기 전, 그들의 생업은 대부분 농업이었다. 그들은 물을 논밭에 대는 관개가 잘 정비된 농업기술이 있었다. 덕분에 양질의 보리, 대추야자,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농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곧바로 금융대부업으로 방향을 튼 것은 아니다. 유대인 대부분은 비단 직물 직공, 염색업자, 재단사, 도축업자, 유리직공, 대장장이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러한 기술직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능숙한 일이었다.

     

    7세기 무렵 서유럽에서 길드가 탄생했다. 길드란 직업상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종 직업 종사자들이 모여 만든 모임을 말한다. 오늘날의 동업자 조합과 비슷하지만 그 권리는 훨씬 강했다. 길드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동시에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냈기에 강한 힘이 있었다. 상인뿐만 아니라 수공업자, 직공의 길드도 생겨났다. 길드에 가입하지 않으면 그 직공을 가질 수 없는 차단제도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직은 동업자간의 서약을 통해 결성되는데 기독교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유대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여러 직업에서 사실상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상당수 유대인들이 금융대부업을 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돈이 어느 정도 생기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생활했다. 대부분 친적이나 지인과 결속해 자금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대부업을 영위했다. 그래서 작은 돈으로도 대부업을 할 수 있었다.

     

    제2차 라테란 공의회

    기독교도 그렇지만 원래 유대교도 대부업을 공공연히 용인하지는 않았다. 가난한 자를 착취해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업으로 재산을 쌓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다. 그런 배경 속에서 1139년 제 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기독교인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했다. 이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폭리를 금하는 기술 이를테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빌려주어라라는 내용 등에 따른 것이다. 유대교에도 구약성경에 가난한 자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고 돈을 빌려줘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어 표면적으로는 이자를 받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프랑스에서 유대교의 지도자 사무엘드 엘렌이 우리 유대인은 국왕과 귀족에게 세금을 내고 생활비도 벌어야 하므로 대부업을 금지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 뒤로 유대인들은 공공연하게 대부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유대인 대부업은 처음에는 전당포로 시작해 나중에는 궁정이나 귀족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까지 나타났다

     

    기독교가 대부업을 금했지만 언제나 돈이 필요한 사람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 대부업의 이율은 30-60%로 오늘날 사채업보다도 높았다. 게다가 복리 계산이어서 조금만 변제가 늦어도 갚아야 할 돈이 빌린 원금의 몇배로 불어났다. 당연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되거나 재산을 빼앗기는 사람이 생겼다. 이는 결국 유대인을 향한 증오를 낳았다. 1275년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유대인의 대부업을 금지하였다. 농업을 할 땅도 없고 길드에서도 추방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몰래 대부업을 이어 갔다 그러다가 국왕의 분노를 샀고 1290년 유대인들은 영국 추방 명령을 받았다 다른 서유럽 나라도 영국에 이어 차례로 유대인을 추방했다.

     

    유대인은 방랑생활을 하면서 무역업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친척과 지인이 전 세계로 흩어져 거래처를 만들기도 쉬웠다. 또 세계 각지를 오가는 무역상이라는 직업은 박해를 받으면 바로 도망칠 수 있었다. 상당수의 유대인이 무역업에 종사하게 된 이유였다.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동안 유대인들은 양측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 유대인은 무역 중개업자로서 양측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서유럽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13-15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에 도달했다. 네덜란드의 세계 진출과 함께 유대인들도 중남미의 브라질에 진출했다. 중남미의 설탕, 커피 무역에는 유대인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유대인의 활약은 북아메리카의 무역에도 두드러져 1701년 미국 인구의 1%밖에 안되는 유대인들의 무역업자의 12%를 차지할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보석, 산호, 직물. 노예, 코코아 등의 무역을 주도했다

     

    금융제도 중에는 유대인이 개발하고 발명한 것이 많다. 자본주의에서 없어서는 안될 유가증권을 발명한 사람도 유대인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금융업자가 많았는데 그들은 돈을 빌려줄 때 차용증서를 채권으로 유통했다. 차용증서를 팔거나 할인을 한 것이다. 이것이 서양의 유가증권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는 그들은 언제 추방당할지 언제 재산을 몰수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산을 현물로 가지는 일은 위험했다. 그러나 유가증권은 그것을 가진 본인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가 없었다. 또 추방당할 때도 종이 한 장만 가지고 가면 된다. 유대인에게 유가증권은 여행자용 수표와 같다. 그래서 증권거래소가 설치됐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했고 영국 최초의 전문 주식중개인도 유대인이었다. 또 무기명 채권을 만든 사람도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신용대출을 시작한 사람도 유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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