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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유 이권 투쟁과 아랍의 사회 혼란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4. 8. 27. 03:31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중동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우디에 버금가는 산유국인 이란과의 관계 덕분이다. 그 당시 미국의 충실한 아랍 지역의 국왕 탈레비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석유 권익에 대한 상당부분은 영국에 빼앗겼다. 이란이 영국 석유 기업인 앵글로-이란석유회사로부터 받은 유전 이용료는 영국 정부에 지불하는 세금보다도 낮았다. 이란은 산유국이었지만 빈곤상태에 있었다. 1951년 국민의 불만을 배경으로 하여 이란의 민족주의 운동 지휘자인 모사데크가 탈라비 국왕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했다. 그는 석유를 국유화하고 회사에 보상금을 지불하지도 않았다. 이란의 혁명에 반발해 영국과 미국은 경제 원조를 중단하자 이란은 소련에 경제 지원을 요청했다. 그후 미국은 정권을 빼앗긴 탈레비 국왕과 접촉하여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그 결과 1953년 탈레비 국왕이 권좌에 복귀했다. 그때까지 이란의 석유는 영국이 독점한 상태였으나 1953년 이후로는 미국기업에 40% 영국기업에 40%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20%를 가져가는 형태로 배분되었다. 탈레비 국왕은 미국으로부터 거액의 무기를 구입하고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사바크의 비밀경찰 조직을 창설하여 공산주의자와 종교지도자들을 단속했다 미국은 중동의 1위 산유국인 사우디 2위국인 이란을 자국의 세력하에 둘 수 있게 되었다

     

    이집트는 파루크 1세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나 영국의 괴뢰정권이었다. 그래서 국민사이에 불만이 많았고 1952년 나세르 대위를 리더로 하는 자유장교단이 이집트군의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유장교단은 이집트의 젊은 장교들이 만든 정치 집단으로 이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자유장교단은 대대적인 토지개혁에 착수한다. 이집트는 일부의 귀족과 부유층이 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한 차별사회였다. 나아가 신정부는 이집트의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나일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건설할 것을 계획했다. 이는 아스완하이댐으로 공사를 위해서는 10억달러가 들어가는 대규모 공사였다 미국은 소련의 무기를 구입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2억달러 융자를 약속했으나 갑자기 융자를 중단하자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고 그 수익을 댐건설 비용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수에즈운하는 프랑스 기업이 개통시켰으나 최대 주주는 영국 정부였다. 국유화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 대가를 지불하여도 어마어마한 수익이 국고로 들어갔다. 두국가는 원수지간이 이스라엘과 결탁하여 시나이반도 침공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헝가리 혁명시기에 발생하여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전국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고 자유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지자 미국이 소련을 비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이집트가 공산주의 진영으로 가담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전투를 중지하라고 하면서 듣지 않으면 영국과 프랑스를 나토에서 추방할 것이라고 했다. 이집트는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달성하고 아랍 세계의 리더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산유국들은 별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석유에서 들어오는 돈이 많아서다. 석유채굴은 먼저 거액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정제 시설 건설, 파이프라인 부설, 유조선 준비 등이 필요하다. 당시 아랍국가는 자력으로 해결할 기술력과 경제력이 없었다. 그래서 구미의 석유 기업들에 권리를 팔고 이권료만 받았다. 그러나 석유회사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막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우디 석유를 독점했던 미국기업인 아람코는 1949년 사우디 정부에 지불할 광구 이권료의 세배나 되는 수익을 거두었다. 아람코가 미국 정부에 낸 세금은 사우디 정부가 수령한 금액보다 400만달러나 더 많았다. 사우디는 베네주엘라를 선례를 본따 1950년에 석유 수익을 55로 분배할 것을 요구했고 받아졌고 다른 아랍국가들도 마찬가지로 교섭에 성공했다. 다만 구미의 석유기업들은 이 이상의 변경에는 여간해선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은 산유량과 석유가격 등 석유 생산에 관한 모든 면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산유국들은 여기에 참견하거나 관여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항하여 구미의 석유자본에 대항할 조직이 창설되었는데 석유수출기구로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베네주엘라가 결성한 국제적인 석유 카르텔 조직이다. 이 조직은 수익 배분율을 산유국이 6으로 변경하는 것과 각국이 국영 석유 회사를 세워 자국의 석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어려운 목표를 처음으로 달성한 사람은 리비아의 카다피 대위였다. 그는 리비아를 55퍼센트까지 배분하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이어 사다트 대통령은 리비아의 카다피의 성공을 보면서 석유의 힘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격멸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동시에 아랍의 산유국들이 공동으로 전 세계에 압력을 가한다는 계획이었다. 즉 이스라엘 쪽에 가담한 서방국가들에 석유 수출을 제한 또는 중단한다는 계획이다. 당시 아랍국가들에 대한 세계경제의 석유 의존도는 최고조에 달해 미국은 28% 유럽국가들은 70% 일본은 44%이었다. 1973년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1967년에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교전을 벌였고 당시 이집트는 호된 패배를 맛보았다. 소련과 미국도 무기 공급을 개시하며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 직후 아랍 산유국의 석유담당장관들이 쿠웨이트에 집결해서 석유 가격의 17%인상을 결정했다 그리고 추가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5% 매월 석유 생산량 삭감과 이스라엘에 가담한 국가에 대한 수출 삭감 내지 추후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고 미국에 전면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 아랍국가들의 석유 생산량은 25%삭감되었으며 석유가격은 반년 사이에 네배나 치솟았다. 이것이 제 1차 오일쇼크다. 이에 미국과 소련이 중개에 나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지역의 일부를 이집트와 시리아에 반환했다. 아랍국가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1차 오일쇼크는 아랍 세계에 균열을 가져왔다. 오일에 빈부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아랍의 맹주격이었던 이집트에는 국고를 기름지게 할 대규모 유전이 없었다. 사우디 쿠웨이트 리비아 등의 석유 수출국들은 급격히 풍요로와졌다. 이집트 같은 비수출국들은 점차 뒤처져 경제적 격차가 균열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필요한 전비를 충당하느라 피폐해졌던 이집트는 세입 부족으로 힘들었다. 게다가 석유 수출로 윤택해진 아랍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해도 호의적인 대답을 얻지 못했다. 1977년 사다트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빈곤층에 대한 식량 보조금을 중단했다.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이에 굴복하여 계속 지급하기로 했다. 그 세입 수입을 충당하기 위해 리비아를 침공했으나 여러 아랍의 비난으로 결국 9알만에 철수하게 되었다. 다음 수단으로는 이스라엘과 화해하는 길을 택했다. 그 배후의 미국의 원조와 서방 진영에 가담해 서방국가들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끌어모을 작정이기도 했다. 1979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아랍국가들은 결국 이집트와 국교를 단절했고 단절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런반면 사우디는 막대한 오일머니로 공공투자를 단행하고 국민들은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고 의료와 교육 서비스를 받았다. 공공투자가 있자 이집트의 노동자는 사우디로 가서 노동자 수출이 이루어져 이집트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이란은 인구 절반이 16세 미만인 젊은 국가였지만 이란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했다. 이란 경제는 석유에 의존하고 있었고 다른 산업은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란의 석유 산업은 기본적으로 구미 산업이 이끌어가고 있었으며 이란 정부는 유전 이권료를 챙기는 데 그쳤다. 제대로 된 국가 경영이 어려웠다. 한편 이란의 국왕과 상류계급들은 미국에서 들여오는 풍부한 물자와 문화를 누리고 있었다. 전통적인 이란에서 보면 퇴폐적으로 볼 만한 문화까지 들어와서 당시의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미국화가 되었다. 여기에 불만이 많은 이슬람 종교인이 많았고 이란 탈레비 국왕은 비밀경찰을 동원해 반발하는 종교 세력을 단속했다. 1978년 이란 국민이 폭발하고 이슬람교 성지 중 하나인 쿰에서의 폭동을 계기로 반정부 시위가 이란 전역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에 국외로 망명해 있던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가 귀국했다. 반정부 시위 운동은 더 손쓸 수 없었고 19791월 탈레비국왕이 미국으로 도망갔다. 따라서 왕정에서 종교 지도자인 호메이니가 통치하는 종교국가가 되었다 이란은 당시 세계 2위의 산유국이었다. 혁명으로 가져온 혼란으로 이란의 석유 수출이 중단되고 전 세계는 두 번째 오일쇼크가 일어났다. 미국이 탈레비 국왕을 보호하자 이란의 혁명군은 여기에 격노하여 테헤란에 소재한 미국 대사관을 습격하여 직원 52명이 감금당했다. 인질들은 1년이 넘어서 교환되었으나 미국은 이란을 악의 축으로 칭하며 대치하게 되었다

     

    1980년 이란 혁명이 야기한 혼란을 틈타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다. 이라크는 이란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어서 움직였다.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원래 국경문제가 있었다. 샤트알아랍강의 영유를 둘러싼 오랫동안 대립해왔다. 이 국경 문제로 수많이 대립하고 충돌했다. 게다가 그 무렵 샤트알아랍강 유역에서 석유 채유가 가능해짐에 따라 양국의 분쟁 수위도 높아졌다. 이라크는 이를 계기로 삼아 오랜 국경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작정이었다. 또한 이란의 종교 혁명이 중동 전체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어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중동 2위의 산유국이었던 이란의 석유를 빼앗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란 이라크 전쟁은 처음에는 이라크 쪽이 유리했으나 자국의 혼란을 수습한 이란이 거세게 반격해왔다. 1982년 상황이 이란쪽에 유리하게 기울자 미국은 이라크에 무기 지원을 시작한다. 원래 이라크는 소련과 우호협정을 맺고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미국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는 이슬람 혁명이 아랍 전역에 퍼지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당시 이라크는 후세인 대통령 정권하에 있었다. 처음에 미국은 후세인 이라크 정권을 지원했다. 이란 이라크 전쟁은 8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며 독가스와 화학무기를 사용해 100만명이 사망한 치열한 전투였다. 그런데 미국은 비밀리에 이란에게도 무기를 팔았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미국은 누구의 편도 아닌 두 나라가 소모전을 하기를 원했다. 이 전쟁은 국제연합 조정으로 1988년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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