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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를 상대로 에도시대부터 성장한 일본이 발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4. 4. 4. 03:08

     

    서독 다음으로 미국의 경제 패권을 위협하기에 이른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 패망이후에 1950년대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수준까지 경제 부흥을 달성했다. 이는 한국전쟁의 영향도 있었다. 1964년 이후에 반세기에 걸쳐서 흑자가 지속된다. 이는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가져오고 1971년 미국은 대일 무역적자가 32억달러에 이른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패배쯤인 1971년에 달러와 금 태환을 정지시킨다. 닉슨쇼크라고도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이 군사력으로 일본을 굴복시켰으나 20년 후 일본은 경제력으로 미국에 커다란 타격을 안겼다. 이후 미국은 경제면에서 깐깐한 태도로 일본을 대하게 된다. 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마찰이 시작된 것이다. 이 무역마찰은 미국이 일본에 수출을 알아서 규제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일본 경제는 전후에 접어들어 급속히 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초고도성장 수준이었다. 18세기 이후 세계의 경제 패권은 구미 국가들에 장악당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국가가 아시아에서 등장했으니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쇄국을 단행해온 일본은 구미의 산업혁명에는 뒤쳐졌으나 개국 이후 단기간에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경제력을 지니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이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전 일본은 부국강병이라는 정책을 내걸고 이를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이룩했다. 메이지유신에서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인 70년간 일본의 실질 GDP는 약 6배 증가했다. 실질임금은 3, 실질광공업생산은 약 30배 실질농업생산은 약 3배 올랐다. 전쟁 전에 초고도 경제성장이 있었다

     

    전쟁 전 일본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규제완화에 있었다. 에도시대까지의 일본은 전국 각지에서 약 300곳으로 나뉜 번들이 각자 통치하고 있었고 번주의 지배하에 놓인 각번의 백성들은 왕래는 물론 경제활동에 대해 강한 규제를 받았다. 신분이며 직업도 고정되어 있는 숨 막히는 규제사회였다. 그러나 메이지 신정부는 봉건제적인 규제를 빠른 속도로 잇달아 철폐했다. 1877년인 메이지 10년에는 봉건적인 규제 대부분이 사라졌다. 따라서 메이지유신을 두고 정권 담당자가 막부에서 메이지 정부로 바뀐 것뿐이며 다소나마 주권은 국민에게 있게 하였다. 대표적인 자유화 정책은 직업 선택의 자유, 교통의 자유, 거주의 자유, 토지 매매의 자유가 있다. 이는 그당시에는 엄청난 개혁이었다. 이는 원칙적으로 태어난 지역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으며 가족의 생업을 이어받아야 했다. 농민으로 태어났다면 태어난 지역에서 평생 농민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지정된 작물 외에는 다른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

     

    봉건제도라 함은 의무와 규제로 유지되는 사회를 뜻한다. 만약 농민에게 직업을 선택할 자유나 거주의 자유를 허용하면 전답을 버리고 어딘가 다른 곳에 갈 수 있다. 막부와 번은 연공 수입을 얻을 수가 없어 그들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에도막부의 재정을 이어받았고 주된 재원은 연공 수입이었다. 그러나 규제 완화를 단행했으며 기적적인 경제성장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한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은 수출 대국이었다. 막부 말기에 외국에 개국한 후 견직물의 원료인 생사는 일본의 주력 수출품이었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는 가격과 품질이 구미의 생사보다 뛰어났다. 에도시대 일본의 각 번이 양잠을 장려하여 양잠 기술은 현저히 향상되었다. 에도시대 동안 100여권의 양잠 기술서가 출판되었다. 이 생사로 인해 메이지 일본은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자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 산업계는 생사 자체를 파는 것보다도 견직물이나 면직물을 만들어 파는 쪽이 더 크게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방직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일본 방적 회사이 선구자는 오사카방적으로 주식을 통해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았고 세계 최대급의 방적기를 도입한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고는 전력을 이용해 24시간 조업을 개시했다. 이제 막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전등을 공장에 대대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직물 기계 면에서도 세계 최첨단을 달렸다. 도요타의 창업자인 도요타 시키치가 만든 자동 직조 기계는 작업 효율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1896년에는 일본 최초의 동력 기계를 발명하는 등 수많은 특허를 취득했다. 이에 자동 기계는 중국과 인도로 수출되어 갔다

     

    일본과 최초로 심각한 경제 대립을 일으킨 상대는 영국이다. 전쟁 전의 일본과 영국은 한때 동맹을 맺는 등 밀월 관계이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산업이 성장함과 더불어 점차 관계가 악화되어갔다. 전쟁 전 일본의 주된 수출품은 섬유제품이었는데 영국 또한 중요 수출품이 섬유제품이었다. 영국은 면공업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으로 세계경제를 이끌었다. 세계 최초로 면공업 동력화에 성공한 국가이기도 하다. 20세기 초까지 면제품은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무역 품목이었다. 일본은 1933년에 영국의 면제품을 능가하게 되었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일본 제품이 순식간에 시장을 점유했다. 영국은 이에 대항하여 인도와 호주와 함께 수입규제를 하면서 블록경제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발발에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경제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은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생산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강재 생산 설비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패전했을 때도 전쟁 전 수준과 비슷한 약 100만톤의 생산능력이 있었다. 일본 산업이 가장 먼저 부활시킨 것은 역시 섬유제품이었다. 일본은 원래 면제품과 견제품 분야에 뛰어났는데 전후 발달한 화학섬유 분야에서도 세계를 이끄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은 구미와 비교했을 때 인건비가 상당히 낮았다. 엔화가 달러의 가치에 비해 꽤나 낮았다. 이런 이유로 일본 제품은 구미의 제품보다도 훨씬 저렴했으며 강한 경쟁력을 지녔던 것이다. 이외에도 트랜스지터 같은 전화 제품들도 맹렬한 기세로 수출되었다. 1969년 일본총리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모종의 밀약이 체결되는데 일본은 섬유제품 수출을 일정 수준이하로 유지할 것으로 요구했다 이는 미국이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시기에 수출을 대놓고 자제해 달라고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은 섬유제품에 더하여 전화, 자동차 등도 수출 공세에 들어갔다. 마침내 미국은 노골적으로 일본에 수출을 억제해 달라고 요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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