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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융자산이 낳은 르네상스의 밀알의 피렌체 도시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4. 1. 30. 03:20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솟아오른 세력이고 제노바는 배산임수의 항구도시이다. 피렌체는 이탈리아반도의 심장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내륙 도시국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도시국가의 상인들은 지중해를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교역망을 구성하며 해양자본주의를 대표했다. 반면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륙에서 꽃피운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이탈리아 중북부에는 수많은 도시국가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바다 건너에서 베네치아, 제노바 또는 피사를 통해 들여온 물건들을 알프스산맥을 넘어 상파뉴 등의 유럽대륙 곳곳으로 운반 판매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내륙자본주의는 해양교역에 다른 점은 상인들의 네트워크에 의존함으로써 신뢰에 기초한 회사들이 네트워크를 발전시켜 금융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군주나 강도에게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아 금은으로 만든 화폐를 직접 가지고 다니기보다는 신뢰에 기초해 거래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무역에 의존하는 해양자본주의와 달리 내륙에서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베네치와 제노바는 바다를 재패한 뒤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무역만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반면 수많은 내륙도시는 상업만으로 생존하기가 어려웠기에 직물이나 무기 등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피렌체는 내륙자본주의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이탈리아 금융 및 산업자본주의의 대표주자 역할을 했다.

     

    피렌체는 13세기부터 서서히 피아첸차나 시에나의 경쟁하면서 금융산업을 발전시켰다. 피렌체의 금융회사들은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서 활동을 벌였다 무역을 동반하는 금융가들은 당시 전쟁 벌이기를 좋아했던 군주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챙겼다. 14세기 피렌체의 페루치회사는 거대 자본금을 자랑하는 금융산업의 공룡이었다. 이 회사는 페루치 가문이 중심을 이루어졌다. 이들은 투자한 자금의 규모에 따라 이익을 분배받거나 아니면 연 8%정도의 고정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페루치회사는 베네치아, 제노바, 나폴리 등 이탈리아 전역에 지점을 두고 있었고 해외에도 아비뇽, 런던 등 주요도시에 지점을 열었다. 페루치회사는 런던 지점과 나폴리 지점이 각각 영국과 나폴리의 왕에게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자 파산하고 말았다. 메디치가문과 회사가 부상한데는 피렌체 경쟁회사들이 파산한 게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메디치은행은 1397년부터 17세기까지 유럽을 대표하는 금융회사로 운영되었다. 더군다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정까지 담당하면서 메디치은행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메디치은행은 정기우편시스템을 두어 정보의 유통이 자본주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메디치가문은 은행뿐 아니라 직물산업을 동시에 벌여 금융업과 산업에 동시에 투자하여 사업 다변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피렌체

    중세에 가장 중요한 산업은 다양한 직물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었다. 유럽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역의 핵심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에서 가져온 사치품과 북유럽 플랑드르에서 생산한 최고의 모직물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양모로 짠 모직은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상품이었다. 따뜻한 이불이나 옷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향신료나 아프리카의 금과 상아를 팔아 북유럽의 모직을 수입하는 일이 이탈리아 상업자본주의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륙 도시국가가 중개무역만으로 생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피렌체에서는 자체적인 직물산업을 육성하면서 자본주의의 차원을 한 단계 높였다. 피렌체에서 화려하게 염색한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모직은 유럽 최고의 천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귀족이나 부자들은 가죽과 털옷을 즐겨 입었고 이 산업은 피렌체 옆의 피사가 전문이었다 그러나 중세후기부터 옷의 선호도가 모직천으로 트렌드가 바뀌었다

     

    피렌체에서는 다양한 직능을 조직한 길드를 아르테라고 불렀는데 1206년에는 환전상들의 모임인 아르테 메르카티가 1212년에는 모직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가 구성되었다. 또한 금융과 모직산업 말고도 의료, 수예품, 식품점, 모피 등 다양한 직종의 아르테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정치체제는 일반적으로 상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금융이나 산업자본 등의 주요한 아르테 대표들이 번갈아들며 도시국가의 정치를 주도했다. 문제는 시민사회의 다수를 점하는 소규모 아르테에서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3787월에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기록할 만한 노동혁명이 일어난다. 일명 치옴피의 난인데 이들은 모직공장에서 양의 털을 빗질하는 단순노동자를 지칭하는 단어다. 노동자들은 도시국가의 정부청사를 점령한 뒤 민중정부를 세웠다. 여기에는 도시의 서민층을 형성하는 시민들이 대거 동참하였다. 민중정부는 시민계층과 노동자들이 분열하였다. 그리고 피렌체는 점진적으로 대자본 중심으로 운영되는 과두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15세기 전반에는 알비치 가문이 강력한 정권을 형성됐고 그 뒤에는 메디치 가문이 서서히 등장하면서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6세기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 공작으로 인정받아 피렌체의 세습군주가 되어 1723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했다 메디치 가문은 여러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프랑스 왕실로 두명을 시집보내는 등 유럽정치의 핵심 가문으로 부상했다 한편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해양제국을 건설하지만 내륙도시국가인 밀라노와 피렌체는 주변 도시국가들을 흡수하므로 점차 도시국가에서 지역국가로 발전하는 양상이었다

     

    피렌체는 14세기에 토스카라 지방에 있는 주변 도시국가로 영향력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피스토이아 등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도시국가들이 하나둘씩 피렌체의 지배 아래 편입되었다. 15세기초 피렌체는 오랜 염원이었던 바다로 진출하게 된다. 이웃 제노바에 돈을 주고 리보르노항을 샀다. 피사의 조선산업과 해양술을 이어받은 피렌체는 이제 바다로 나가 베네치아와 제노바와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베리아 반도의 세비야, 리스본에 거점을 두면서 북해까지 진출, 플랑드르 지역에서 시장과 항로를 운영했다. 16세기에는 영국 대신 이베리아 반도에서 양털을 수입했고 또 15세기에는 실크산업을 발전시켜 견직 분야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피렌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자유무역항이라는 개념도 처음 도입했다. 1675년 피렌체는 리보르노항에 관세없이 상품을 수입하고 수출하는 획기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정치체제의 경우는 공화제에서 서서히 군주제에 가까운 권력집중을 이뤄냈다.

     

    르네상스의 원동력은 로마가 아닌 피렌체라고 한다. 피렌체의 정신과 문화가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한 결과 르네상스가 만개할 수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사업과 정치와 문화에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 무수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은행업과 직물산업에 기반을 두고 정계에 진출한 메디치가문이야말로 이런 현상을 대표한다. 한편 로마제국에서는 빵과 서커스라고 해서 부호들이 서민들에게 음식과 오락을 제공하는 전통이 존재했다.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전통이 예술분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은 당대 최고의 문인과 예술가들을 초빙해 자유로이 활동하도록 지원했다. 다른 도시국가들도 이런 동향에 동참하여 문화가 꽃피우는 토양이 형성된 것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인 단테와 보카치오는 모두 피렌체 사람들이다. 그들은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의 문화적 전환을 통해 잠재적 민족의식을 생성하는데 이바지했다. 그리고 보티첼로와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도 피렌체 출신 예술가다.

     

    풍요로운 경제와 화려한 예술을 자랑하던 피렌체는 쇠락하게 되었다. 이는 풍요로운 삶은 종종 무력을 키운 이웃 나라에 치명적인 유혹이 된다. 이탈리아도 15세기 말부터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강력한 군사 강국들의 각축장으로 돌변한다. 한편 분열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외부의 힘을 빌려 경쟁에서 우세를 점하려 했다. 그때마다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거나, 스페인 함대가 바다를 건너 침략해 들어왔다. 17-18세기가 되면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 중북부 일대는 유럽의 낙후지역으로 추락한다. 잦은 외세 침략과 도시 약탈 그로인한 인구 감소 등은 경제의 쇠락을 심화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회 내부에도 몰락의 원인이 있었다. 기술을 개발하고 교육했던 아르테가 특권화 보수화 되었고 상인과 자본가들은 도전정신을 잃어버리고 토지를 구매하며 귀족 행세를 하려고 했다. 즉 풍파가 잦은 사업가보다는 도시국가의 고관이 되기를 선호했다. 게다가 네덜란드와 영국의 사업가들이 이탈리아의 뒤를 이어 국제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세계경제의 상권이 이탈리아에서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북해로 옮겨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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