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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전국 독일이 일군 기적적인 경제 성장의 요소는 무엇인가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4. 1. 18. 03:18

    라인강의 기적
    서독 국내총생산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시점에서는 미국이 세계경제를 압도적으로 독식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그 아성에 도전하는 국가가 출현했다. 그것은 서독이었다. 서독의 공업 생산이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6년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1949년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일본의 공업 생산이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1955년 무렵으로 전후 10년이 지난 때다. 그 후에도 서독 경제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1950년부터 1958년 사이에 국민소득 2.2, 국민총생산은 2배고 수출도 4.4배 증가했다. 따라서 1959년에 국내총생산에서 프랑스를 앞질렀고 1960년에는 영국을 제치고 세계 2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흔히들 미국의 원조가 컸다라든가 서독은 군사비를 지출하지 않았으므로 그만큼 경제 발전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미국의 원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보다 적었다 그리고 연합국이 점령하는 동안의 경비는 서독의 몫이었다. 따라서 군사비 지출이 낮지도 않았다.

     

    통일 독일

    서독이 다시 빠르게 부흥한 요인은 원래 독일은 잠재력이 높은 나라였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독일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공업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를 상대로 1개월 남짓 만에 승리를 거두었고 영국과 소련을 항복 직전까지 몰아갔다. 또한 독일의 공업 설비는 전쟁으로 인해 심각하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즉 전쟁 후 20%정도만 산업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공업이 발전한 이유는 19세기 후반까지 독일은 여러개의 주로 국가가 나뉘어 있었다. 프로이센이 보불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며 독일의 중심 권력을 얻었고 1871년에야 드디어 통일이 되었다. 그리고 1888년에 즉위한 빌헬름 2세가 독일의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제국주의가 휘몰아치는 와중이라 공업화를 진행하지 않으면 타국이 독일을 집어삼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교육에 힘을 쏟아 기초 교육과 고등교육 정비를 단행했다. 이때를 시작으로 수준 높은 독일 대학들은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했다

     

    게다가 독일은 지리적으로 공업화에 적합했다. 라인강의 수로와 비스마르크 시대에 정비된 철도망을 통해 공장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루르공업지대의 코크스 공장에서 제조되는 저렴한 타르, 네카르 계곡 등지에서 산출되는 소금, 동프로이센과 알자르에서 채굴되는 칼륨 광석, 루브지방의 석탄, 알프스의 풍부한 수량을 활용한 수력발전 등 공업이 발전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후 독일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공업 생산을 선도하게 된다. 1870년에 독일은 이미 세계공업 생산의 13%나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10년이 되면서 독일은 16%, 영국은 15%를 나타내며 역전이 벌어진다. 프랑스의 경우 6%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공업의 급속한 발전은 구미의 여러 권력이 유지하던 균형을 붕괴시킬 만한 것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모두 독일에 대한 공포심이 전쟁 발발의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부흥하지 못하도록 강화 조건으로 철저히 쓴맛을 보여줬다. 독일의 식민지 모조리 빼앗고 인구의 10%을 잃고 영토의 13% 농경지 15%, 철광석 광상의 75%를 잃었다 군대는 해체된 것과 진배없었고 배상금은 거의 330억달러로 독일 세수의 십수년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로 인해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으며 산업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독일 경제는 다시 부활했고 히틀러 정권에서 재군비에 돌입하였고 순식간에 유럽 최대의 군사국가가 되었다. 게다가 제트기와 로켓을 앞서 개발하는 등 수준 높은 과학기술을 보유했다.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이 간신히 독일을 패배시켰다. 패배 후에도 여전히 공업국으로 부흥해나갔다. 서독경제의 급격한 성장에 가장 위기감을 느낀 것은 미국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서독이 보유한 대량의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한편 전후 세계경제는 달러가 유일한 금태환 통화로 자리 잡았으며 국제무역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기축통화를 유지하기 위해 서독에 로비를 해 무역흑자로 미국의 무기를 사도록 하는 등 다른 방법을 써서 금교환을 되도록 막으려고 했다. 이에 대해 서독이 내켜하지 않자 미국은 주둔군을 철병시키겠다고 하였다. 서독입장에서는 미국 주둔군은 안전망과 같은 의미었다. 그리고 미국은 서독이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960년대 미국의 무역적자로 인해 금 유출이 이어졌고 달러 신용이 저하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달러와 금을 교환을 청구해서 미국을 궁지에 몰았지만 서독은 그렇게까지는 않았다. 그러나 훗날 프랑스와 힘을 합쳐 유럽연합을 창설하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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