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동아시아 곡물주인 황주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술의 세계 2023. 12. 27. 03:22

     

    고대 중국의 술은 잡곡인 피를 원료로 한 것이었다. 은나라(기원전 1600-1064)의 술은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은대 유적에서 축제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작 등의 술그릇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은을 무너뜨린 주(기원전 1046-770)는 왕실 일족을 지방으로 파견해 일대를 다스리도록 하는 봉건제를 실시했다. 지방관이 임지에 부임할 때 지배의 상징으로 주나라 왕이 하사한 것이 다름 아닌 작이라는 술그릇이었다. 귀족을 뜻하는 후작과 백작의 칭호는 신분을 나타내는 술그릇에 근거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도 과도한 음주는 악이라고 지탄받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술로 욕망을 채운 주왕을 철저하게 꾸짖었다.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은 원래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수려했으나 그가 정복한 유소 가문이 보낸 보기 드문 미녀 달기를 총애하게 되면서 사치와 포악한 처사를 일삼게 되었다. 주왕은 음탕과 주색잡기로 유명한 주지육림이라는 고사가 나왔다. 대규모 유원지에 연못을 파서 술로 채우고 나뭇가지마다 말린 고기를 걸어 숲을 만들었는데 이곳에 벌거벗은 남녀를 풀어놓고 연회를 베풀어 달기와 함께 즐겼다.

     

    전한시대(기원전 202 - 기원후 8)에 서방에서부터 보리가 전해졌다. 그전까지 황하 유역에서 나는 주요 곡물은 조와 기장이었는데 이중 술의 원료가 된 곡물은 기장이었다. 오늘날에도 조도 소주의 원료로 사용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기장을 술의 원료로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기장은 당화하지 않으면 술로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누룩이 필요했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누룩을 곡이라고 했는데 이는 원료인 곡물을 가루로 만든 후 물로 반죽하여 경단 모양으로 빚고 여기에 거미집 곰팡이를 1개월 정도 번식시킨 것이었다. 병국이라고도 불렀다. 주나라의 술은 황토 대지에 구멍을 파고 기장에 물을 섞어 발아시킨 후 누룩으로 발효한 일종의 탁주였다. 술은 왕의 권위의 원천인 하늘의 신께 제사 지내는 의식, 왕실과 각지를 지배하는제후 사이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에 필요했다. 왕은 각지의 제후가 정기적으로 알현할 것르 의무화하여 수도로 모였는데 알현 후에 연회도 중요한 국가행사 중 하나였다. 술은 연회라는 엄숙한 국가 의례와 연관되었으며 엄격하게 격식을 차리며 마셔야 했다. 주나라에서는 천지의 운행과 사계절의 순환에 따라 천관, 지관, 춘관, 하관, 추관, 동관이라는 여섯 개의 관청을 두었는데 천관을 주정이라는 장관이 관할하며 술을 양조하고 단속하는 부서가 딸려있었다. 궁정의식을 치르려면 많은 양의 술이 필요했다

     

    은나라의 왕이 신을 모시는 제사에서 사용한 술은 기장으로 만든 술에 카레에도 넣은 황금색 울금을 끓인 물을 넣어 만든 향이 강한 약주였다. 태양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이 술을 지면에 뿌리며 신령을 모셨을 터이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산동지방의 명산 태산에 올라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 예를 집행하며 자신이 천하의 지배자가 되었음을 여러 신들에게 보고했다. 봉선은 황제가 천지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시황제가 봉선을 집전할 때는 은나라 때 사용하던 황금색 술의 양조법은 이미 잊힌 후였다. 시황제는 산동지방의 기장으로 만든 술을 여과시켜 봉선에 사용했다고 한다. 중국의 양조주는 여러 브랜드가 있는데 술 색깔이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띤다는 특색이 있어 황주라고 총칭한다. 술 색깔의 농도에 따라 색이 짙은 술을 노주, 연한 색 술을 청주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북쪽의 전통적 원료인 기장, 남쪽지방에서 산출되는 쌀로 만드는 황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 각지 문화가 교류한 산물이며 중국을 대표하는 술이 되었다. 황주는 중국의 맥주라고 불린다

     

    여러 황주에서도 명주로 청나라 미식가 칭송하는 술은 사오싱주을 들수 있다. 중국의 술은 그 이름을 산지에서 따온 것이 많은데 사오싱주는 저장성 항저우 동남쪽 약 70km에 위치한 운하마을 사오싱에서 양조된 술을 의미한다. 사오싱은 중국 근대의 문호 루쉰과 철학자이자 교육자로 명망이 높은 차이위안페이 등 많은 위인을 배출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샤오싱주는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와신상담과 오월동주 등의 고사와도 관련이 있다. 오나라에 패한 월나라의 구천이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해 쓴 간을 핥으며 재기를 꽤한 회계산이 샤오싱 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또한 송은 금에 중국 북부를 빼앗겨 남송시대를 열었는데 재원 확보를 위해 술 양조를 장려했다. 남송의 수도 항저우에서 막대한 술이 소비되었다. 명주 사오싱주도 그때 많이 소비되었다. 샤오싱주는 우선 찹쌀을 큰 독에 넣고 물을 부은 후 찌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여뀌와 멥쌀로 만든 주약과 병국을 첨가해 발효시키고 이를 여과시켜 가열 살균한 다음 독을 연꽃잎과 기름종이로 덮는다. 그 위에 뚜껑역할을 하는 접시를 올려 점토를 발라 굳힌 후 장시간 숙성시키면 완성된다. 일본에서도 황주 제조법을 했는데 이들은 독 대신 나무 술통에 숙성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청주를 만들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