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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와 대조적인 상업자본주의가 발달한 제노바에 대해서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3. 10. 10. 03:55
제노바는 인구가 100만명이 넘는 현대 이탈리아의 6대 도시 중 하나다. 12세기 독립을 쟁취한 시점부터 18세기 프랑스에 병합될 때까지 700여년 동안 지중해를 무대로 활동했으며 한때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기도 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여러 면에서 닮았다. 둘 다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를 끼고 있는 도시국가인 데다가 군사력과 무역을 통해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를 묶는 제국을 형성했다. 또한 개척자 정신으로 먼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상업적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이는 두 도시국가를 살찌우는 밑천이었다. 한편 베네치아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자본주의를 대표했다면, 제노바는 민간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유형에 가까웠다. 이처럼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서로 경쟁하고 자극하면서 발전했고, 때로는 전쟁까지 치르면서 대립했다. 즉 제노바의 상업자본주의와 베네치아의 국가자본주의 모델로 전개되었다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 북부에서 각각 동쪽과 서쪽을 차지하고 성장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전에는 육지보다 바다에서 이동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이런 이유로 베네치아와 제노바 두 항구도시가 발달했다. 이탈리아에서 마지막 승자가 될 도시는 반도 중간이나 남부보다는 가장 북부에 있었다. 북부에 자리 잡아야 유럽대륙과 육로로 가장 쉽게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및 독일 남부와 가까이 있었고 육로로 발칸반도 및 폴란드와 연결되었다. 제노바도 스위스와 프랑스 인근에 있어 지중해 각지에서 가져온 상품을 12-13세기 유럽대륙의 무역 중심지였던 프랑스 상파뉴에 공급하기에 수월했다. 제노바의 함선이 흑해나 서아시아에서 가져온 상품들을 제노바항에 풀면 이탈리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이를 구매해 육로로 알프스산맥을 넘어 상파뉴까지 가서 판매했던 것이다 한편 베네치아는 석호를 메워 건설된 도시국가이지만 제노바는 항구를 끼고 자연스레 발달한 도시국가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여러강의 하루에 있어 바다에서 세력을 키운 다음 강을 따라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제노바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야 했기에 내륙 진출이 어려웠다 베네치아가 해양국가와 동시에 육지국가의 면모를 발전시켰던 것과 달리 제노바는 해양 확장에만 의존해야 하는 지리적 한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관점에서 베네치아는 동유럽을 향한 전진기지였고 제노바는 서유럽으로 뻗어나가는 길목이었다. 두 도시국가의 역사에 강한 영향을 미쳤는데 베네치아는 독일이나 비잔틴제국과의 관계에 민감했다면 제노바는 프랑스, 스페인 등과 직접 연결되었다. 제노바는 11-12세기에 힘을 키워 아랍 세력을 티레니아해에서 물리치면서 코르시카섬과 사르데냐섬 등을 정복했고 이어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해 무역기지를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아프리카와의 무역의 장을 열었다는 것은 사하라사막을 넘어오는 금을 확보했다는 의미이다. 이 금은 서아시아에 가서 필요한 상품을 구매해 유럽으로 가져올 수 있는 자금이 되었다. 1099년부터 제노바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1162년에는 완전히 독립했다. 베네치아가 비잔틴제국에서 독립했듯이 제노바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서 독립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등장했다. 아랍 세력을 누르고 지중해 서부에서 부상한 제노바는 십자군 원정에 함선을 제공함으로써 지중해 동부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제노바는 십자군이 서아시아에 수립한 왕국과의 무역을 독점했고 베네치아와 경쟁적으로 비잔틴 제국에 해군력을 제공하면서 무역에서 또 다른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이탈리아 피사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탈루냐를 중심으로 하는 아라곤 왕국도 제노바의 패권에 도전했다. 제노바는 1284년 피사를 해전에서 물리치면서 티레니아해를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는 쉽게 승부를 가룰 수 없었다. 그 결과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13-14세기의 100년의 넘는 기간 동안 네 차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어느 한편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지중해무역은 두 세력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형식으로 고착되었다. 베네치아는 서아시아와 이집트와의 교역에서 우위를 점했다면 제노바는 흑해와 비잔틴 제국과의 무역에서 우세를 유지했다. 역사학자 로페즈는 중세의 상업혁명에서 18-19세기 산업혁명 이전에 이미 일련의 혁명적 변화가 중세 유럽에서 발생했고 향후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는 주장을 폈다. 상업혁명의 전형적인 예가 제노바인데 말 그대로 상인에 의한, 상인을 위한, 상인의 정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정치권력을 가진 세력은 무력과 폭력을 사용해 통치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지배를 정당화했다 무력은 지배의 가장 노골적인 수단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려면 너무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도덕과 종교는 자발적 복종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비용도 절감하고 통치도 수월해졌다. 이에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는 경제적 부를 정치권력의 기반에서 핵심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도 무역 등 상업에서 부를 가져왔지만 아직 비천한 활동이며 여전히 전쟁에서 얻은 명예의 가치가 사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귀족이 국제무역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했을 뿐 아니라, 도시국가의 정치와 정책도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집중되었다. 이들 전쟁에서는 종교적 차이나 왕위 계승과 같은 정치적 명분은 없었다. 대신 상업 이익을 추구하는 두세력의 지중해무역을 둘러싼 이권을 차지하고자 치열하게 다퉜을 뿐이다 한편 베네치아 자본주의적 발전의 원동력은 국가가 함선을 제작하는 조선소를 운영했고 주요 무역노선의 관리도 국가가 했지만 제노바는 이 모든 기능을 민간에게 담당했다
1150년부터 제노바 정부는 화폐를 주조하는 일이나 소금사업, 은행업 등의 사업권을 민간에 일임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심지어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도 사업자집단에 일정 기간 양도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식민도시나 무역거점을 관리하는 방법도 달랐다. 베네치아는 정부가 식민도시를 직접 관리하면서 도시마다 대표와 무장조직을 파견했다. 반면 제노바는 각각의 식민도시에 체류하는 민간 상인들이 자율적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는 형식을 채택했다. 전자가 피라미드식 위계조직이었다면 후자는 자율적인 네트워크였다. 제노바의 정치는 주요 상인가문들이 정쟁을 벌여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1257년부터 1528년까지 제노바에는 81차례의 반란과 정권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노바가 급격하게 몰락하지 않고 나름의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광물의 일종인 명반은 제노바의 국운을 좌우할 핵심적인 전략상품이다. 명반은 수공업의 재료나 약재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지만 특히 섬유산업에 필수적인 재료다. 직물이나 옷감을 염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염제이기 때문이다. 제노바의 자카리아 가문은 13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 황실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소아시아 지역에서 명반을 채굴하고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14-15세기가 되면서 명반은 에게해의 키오스섬에서 주로 생산되었지만 여전히 제노바 상인조합이 이를 독점적으로 관리했다 지중해 동부에서 생산된 명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지역은 모직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대서양 지역의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13세기까지 지중해무역에 치중하던 제노바상인들은 1278년부터 지브롤터해협을 넘어 대서양으로 진입한 뒤 영국과 네덜란드까지 가는 항로를 개발해 정기무역 노선으로 삼았다. 명반무역은 기존의 사치품과 달리 무거운 광물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갤리선보다 더 커다란 범선이 필요했다. 베네치아의 대형 갤리선들이 300톤 정도의 규모였다면 제노바가 보유한 원형 범선은 1000톤 이상으로 거대했다. 이런 이유로 플랑드르 함대는 런던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사우샘프턴에 정박해야 했다. 무거운 명반을 싣고 북유럽에 간 거대한 함선들은 돌아오는 길에는 마른 생선이나 양모를 가득 싣고 올 수 있게 되면서 사치품에서 생활용품이나 원자재로 확산했다. 덕분에 피렌체 등의 도시에서는 북유럽의 양모를 수입해 모직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제노바의 상업자본주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상업정신이 모든 사람에게 광범위하게 퍼진 대중자본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제노바는 자산가나 귀족계급의 상인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모험적 무역에 돈을 댔다는 것이다. 베네치아에서는 국가가 자본주의를 조직하면서 공공재를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제노바에서는 국가가 정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간의 협력만이 공공재를 생산하는 중요한 장치가 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기관이 1407년 만들어진 산조르지오은행이다. 이 은행은 제노바 정부에 자금을 빌려준 자본가집단이다. 베네치아의 보호성인이 마르코이듯, 조르지오는 제노바의 상징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따라서 산조르지오은행은 제노바은행인 셈이다. 원래 국채를 관리하고 정부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만들어진 채권자집단이 여려개 있었는데 이를 15세기 들어 통합한 결과가 바로 이 은행이다 또한 제노바의 금융혁신은 최초의 해상보험을 발명하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국가가 함대를 조직해 운영했기에 보험을 만들 동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에 비해 모든 것을 민간협력에 의존했던 제노바가 해적이 날뛰는 지중해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해상보험을 개발한 것이다
제노바 상인들은 거대한 자본가가 되었지만 도시국가 제노바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노바의 자본가들은 이제 새로운 모험과 사업에 투자하는 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16세기에 세계를 향한 미래지향적 사업의 중심인 이베리아 반도의 대항해 시대의 투자이다. 여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자금을 대고 이익을 챙겼던 세력은 그 나라의 자본가들이 아니라 바로 제노바 자본가들이었다. 또한 제노바는 자본뿐 아니라 지중해와 유럽에서 축적한 제국 운영과 무역의 노하우를 이베리아반도에 전파했다 한편 합스부르크가문의 왕 카를 5세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등 주요국가를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1522년 팽창하던 프랑스의 위협에 직면한 제노바의 독립을 앞장서서 지지했고 1528년부터 제노바 은행가들은 카를 5세에게 자금을 융통해 주기 시작했다. 마침내 제노바인들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스페인의 은행가로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그때까지 스페인 왕실의 재정을 지원했던 것은 독일의 금융자본을 꽉 쥔 푸거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가문이 오래전부터 게르만 민족의 자본과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필리페 2세가 1557년 파산을 선언함으로써 오스트리아 및 스페인 왕실에 자금을 제공했던 푸거가문은 쇠퇴했고 대신 제노바인들이 스페인의 핵심 금융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스페인의 세계지배는 그들의 무력과 제노바의 자본이 결합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제노바 자본가들은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들여오는 막대한 은을 유럽 전역에 공급하면서 다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스페인은 독립을 꾀한 네덜란드와 80년전쟁(1568-1648)을 치르며 막대한 자금을 네덜란드 주둔군에 쏟아부어야 했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전역에 지점을 갖고 있던 제노바 자본가들은 쉽게 자금을 이전할 능력을 갖춘 금융 중개업자들이었다. 포르투갈 왕실의 재정을 담당했던 것이 제노바의 로멜리니 가문이었다. 한편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를 걷는 국가들은 처음에는 무역이나 생산활동에 집중하다가 자본이 많이 축적되면 금융인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모은 다음에는 돈놀이만으로 소득이 만든다는 것이다. 제노바가 이런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를 제일 처음 개척한 사례이다. 제노바의 자본가들이 국제적으로 활약하던 시기에 도시국가 제노바는 고난과 멸망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노바는 프랑스와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의 잦은 침략에 위기 상황을 겪다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군이 제노바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부국은 사라지고 부자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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