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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여성해방가 상드의 사랑과 그 끝은 어떻게 되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음악 2023. 9. 7. 03:52

     

    조르주 상드(1804-1876)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즉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선구자적 역할뿐 아니라 정치와 혁명에까지 참여했다. 그녀는 문사이며 보헤이안적 기질를 가진 여인이다. 상드는 호텔 숙박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고 한다 < 가족 주소-자연, 떠나온 곳 -, 행선지-천국, 직업-방랑자 > 그녀는 세상의 어떤 편견이나 규범에도 구속되지 않는 참 자유인이다. 상드는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송연을 물고 남장을 하고 다녔다. 이는 할머니로부터 어렸을 때 사내아이 복장과 말을 타며 벌판을 바람처럼 내달리며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상드가 성장해서도 남장을 고집했던 이유는 남성 중심 사회를 향항 도전이라는 상징성 외에도 여성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탈코르셋 운동과 맥락이 닿는다 상드는 남성이나 작업복 차림으로 돌아다는 것을 좋아하고 거리낌 없이 담배를 물고 다닌 것이다 애정행각도 거침이 없어 남성이 주도하는 사랑에 반기를 들고 당시 프랑스의 저명인사로 상드와 연애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상반된다

     

    상드의 남장

    플로베르는 상드를 위대한 인간, 위대한 마음이라 칭송했다. 당시에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속에서 한 여성을 위대하다고 말한 것은 대단한 용기로 볼 수 있다. 이 칭송의 대열에는 앙드레 모로아, 도스토옙스키, 스탕달, 에밀졸라 같은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합류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보들레르는 상드를 변소 그것도 남자들만이 사용하는 학교나 군대의 공중변소라고 혐오했고 다른 비평가들은 오물을 세척하는 배수구, 혹은 귀족들의 하수구, 음탕한 여자 부정한 어머니로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욕을 가했다. 상드에 긍정적인 인사들은 상드의 애정행각이 단순히 성애에만 탐닉했던 당시 상류층 여성들과는 그 층위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상드의 진보적인 여성상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그러한 돌출적 행동의 기제라고 생각한 듯하다

     

    리스트

    상드와 쇼팽의 사랑은 욕구 상보성에 대표적이다. 상드는 적극적이고 진보적이며 거칠 것 없는 솔직함과 결단력의 소유자이고 쇼팽은 가늘고 긴 손가락의 소유자가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섬세한 성격을 가진 피아니스트다. 이들이 사랑에 빠진 이후 그 사랑이 자기 예술의 영역에서 창조의 영감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9년간의 사랑 속에 쇼팽은 수십편의 걸작을 쏟아냈고 상드는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한편 쇼팽은 음악적 탁월성뿐 아니라 세련되고 지적인 대화를 하며 인문학적 교양이 뛰어난 인물로 모든 살롱에서 가장 모시고 싶은 예술가였다. 상드는 바지를 입은 최초의 여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파격적인 복장에 남의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남성들과 맞담배질을 하였으니 사교계의 이단아로 유명세를 탔다. 이들의 거간꾼은 쇼팽보다 한 살 아래인 로맨스의 챔피언이자 매력이 철철 넘치는 바람둥이인 리스트가 주선했다.

     

    마리 백작부인

    당시 파리 사교계의 명소로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살롱이 있었다.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은 나중에 남편과 자식조차 버리고 리스트와 도피행각을 벌임으로써 파리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부인의 살롱은 당대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리스트는 26세 리스트와 그보다 6세 연상인 32세 상드를 서로에게 소개한다. 183611월이었다. 이들의 첫 만남은 서로의 혹평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그 당시 백작의 딸에 구혼하다가 좌절되고 실의에 차 있었다. 그러나 상드는 적극적으로 대시하여 진실한 행복과 예술혼을 찾아 줄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상드는 쇼팽에게 당신을 열렬히 사랑합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상드는 사랑을 위해서는 상처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꽃의 향기를 위해서는 가시가 있는 덤불 속에 기꺼이 손을 넣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의 시 <상처>를 보면 사랑이란 상드에겐 생명 그 자체임을 알수 있다

     

    상처 <조르주 상드> - 덤불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안다 / 꽃을 더듬는 내 손 거두지 않는다 / 덤불 속의 모든 꽃이 아름답진 않겠지만 /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기에 / 꽃을 꺾기 위해서 가시에 찔리듯 / 사랑을 얻기 위해 /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한다 /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므로 /-결국 상드의 고백은 쇼팽을 움직인다. 이후 두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상드는 쇼팽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시로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 편지에 보내기도 한다. 이 무렵 쇼팽은 앓고 있던 폐결핵이 차츰 악화되자 의사는 상드에게 공기 좋은 곳으로 데려가서 산책하게 하면 그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고를 했다. 이에 상드는 15살 아들 모리스와 10살 솔랑주와 함께 마요르카로 떠났다. 이 여행은 상드에게는 사랑의 도피행각이고 쇼팽에게는 신혼여행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 섬은 스페인 남쪽에 있는 큰 섬이며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으로 여름에는 건조하지만 겨울에는 강수량이 많았다. 1839년 겨울은 유난히 춥고 혹독했다 예상치 못한 기후는 쇼팽의 결핵을 악화시키고 악성 기관지염이 생기고 각혈까지 하게 된다. 집주인은 폐병이 전염될까봐 쇼팽 일행을 크리스마스 전날 쫓아낸다. 그리고 발데모사 산간의 카르투하 수도원에 방 두 개를 빌려 살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종교적 도그마가 삼엄하여 합법적 부부관계가 아닌 이들을 냉대한다 그래서 쇼팽은 수도원의 고립된 생활속에서 불안과 긴장 속에서 신경항진증으로 고통을 당한다. 한편 쇼팽은 여기에서 빗방울 전주곡을 작곡한다. 상드는 이 곡이 탄생한 이야기를 그의 글로 나타냈다 - 쇼팽은 자신이 호수 속에 빠진 걸 보았다. 무겁고 얼음같이 찬 빗방울이 자신의 가슴 위로 격류처럼 떨어졌다. 내가 그로 하여금 지붕 위로 마구 퍼부어 대는 진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했을 때 그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천재는 자연의 신비로운 하모니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걸 그의 외계의 소리를 노예적으로 반복하는게 아니라 그 자신의 음악적 사고와 동등한 숭고한 상당어구로 번역해 놓았다. 그날 저녁의 그의 작곡은 수도원의 기와 위로 단조롭게 반항하는 빗방울로 흠뻑 젖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그의 상상력으로써 그리고 그의 멜로디로써 그 가슴속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물로 번역해 놓았던 것이다

     

    단테와 함께 14세기 피렌체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세 문인이 있었으니, 단테를 비롯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그들이다. 사람들은 이들의 작가적 상상력의 원천을 마르지 않는 세 개의 샘이라고 칭송했다. 영감의 배후에는 모두 구원의 여인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테에게 베아트라체가, 페르타르카에게는 라우라가, 보카치오에게는 피아메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 문학이 가능했던 것처럼 상드도 쇼팽의 구원의 여인이 된다. 쇼팽은 자신의 음악이 오로지 상드를 위한 것임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상드의 남성 편력은 요란하였다. 쇼팽과 헤어진 이후에도 13세 연하인 조각가와 15년간 동거한다. 63세의 나이에도 20세 연하와 정열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한편 그들의 결별에 있어 상드가 쇼팽의 병간호에 점차 지쳐 갈 때쯤딸 솔라주는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 상드와 심각하게 대립했다. 상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솔라주의 처지를 동정하고 도움을 베풀었다 이에 노발대발하고 상드는 쇼팽에게 결별의 편지를 보내고야 만다. 상드는 쇼팽의 지나치게 진지하고 예민한 성정에 지쳐 있었고 상드는 냉정하고 단호하게 이별을 선언했다

     

    저축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던 쇼팽은 상드와의 결별 후 무일푼이 되었다. 쇼팽의 여제자 스텔링이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연주여행을 제안했다. 대영제국의 상류사회에서 쇼팽의 명성은 이미 자자하기 때문에 파리에서보다 훨씬 더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쇼팽은 런던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병세가 악화일로에 있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습한 기후 때문인지 심한 감기에 걸려 두통과 호흡곤란과 그 외의 나쁜 증상들이 재발되어 육체적으로 피폐되어 있었다 영국을 다녀온 쇼팽은 건강상의 최대 위기를 맞는다. 그는 병상에서 상드를 다시 만나길 무척 바랬다. 이에 즐랭 부인이 쇼팽의 마음을 상드에게 전해 주었으나 상드는 일말의 동정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쇼팽은 자기가 죽은 뒤에는 쓰다가 만 작품이 발견되거든 불에 태워 버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품을 남겨 두었거나 또 그런 작품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18491017일 새벽 3시에 쇼팽은 운명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러시아의 압제 속에 신음하는 폴란드의 흙을 한 움큼 담아 바르샤바를 떠났던 쇼팽은 그가 평생 간직했던 고국의 흙과 함께 파리의 묘역에 안장되었고 그의 심장은 누이의 요청에 의해 따로 떼어져 바르샤바의 교회 주석 밑에 안장되었다

     

    빗방울전주곡을 들으며 잠시 쇼팽과 상드의 마요르카에서 사랑의 멜로디로 들어보세요

    https://youtu.be/2mz-zejex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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