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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과 시안도 있는데 왜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가 되었는가 ?아들을 위한 인문학/일반상식 2023. 5. 1. 03:56
베이징이 처음으로 중국 왕조의 수도로 등장한 시기는 전국시대 연나라(고조선과 대적한 나라)때이며 현재의 수도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원나라 때부터다. 쿠빌라이는 중국을 정복한 후 대몽골국이라는 국명을 대원으로 바꾸고 지금의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면서 중국 본토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쿠빌라이는 새로운 도시 건설을 명하였고 20여년의 대역사 끝에 중화식 도성으로 이루어진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가 세워졌다. 중국 고대 왕국의 수도였으며 지정학적으로 중국 통치에 보다 유리한 곳들은 시안, 뤼양, 난징 등이었다. 그런데 쿠빌라이는 동북 변방에 머물렀던 베이징을 수도로 택했다. 사실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나라들은 원나라 이외에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한족이 세운 명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있다. 그런데 명나라를 제외하면 모두 북방에서 발흥한 이민족들이다.
이들이 하나같이 베이징을 수도로 택한 이유는 베이징의 기후 특성에 기인한다. 베이징의 연평균 강수량 약 500mm로 유목생활과 농경생활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한족이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은 유목과 농경지대를 가르는 선과 대략 일치한다. 베이징은 만리장성으로부터 남쪽으로 불과 8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베이징은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인에게는 자신들이 남하할 수 있는 최남단 지역이었다. 여진족과 만주족 또한 유목이외에도 수렵과 농경을 함께 하며 살던 부족이었으므로 베이징을 수도로 택하였던 것이다. 원나라는 중국을 통치하면서 점차 한족의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다. 유목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던 몽골족의 원나라는 100년도 안 되어 패망의 길을 걸었다. 칭기스칸은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유목민이 아닌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베이징에 세운 이유는 원래 명나라는 원나라 지배에 반발하던 강남지역에서 봉기하여 세워진 왕조였으므로 초대 황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인 난징에 수도를 세웠다. 그리고 아들들에게는 변병의 봉토를 주어 수도에서 멀리 떠나보냈다. 그러나 베이징에 자리 잡은 넷째 아들(영락제)이 반란을 일으켜 난징을 불태우고 자신의 세력기반이면서 몽골과 국경을 맞댄 분쟁지대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베이징으로 천도하여 북경이라 하였는데 베이징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 한편 차이나는 외국 상인들이 진나라의 진이란 이름이 서구에 알려지면서 도자기로도 쓰였다 차이나를 음역하여 지나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까지 한국과 일본에 알려졌다. 청일전쟁 승리이후 일본은 중국을 비하하여 동지나해 또는 남지하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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