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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가람의 시간을 거슬러 물길 따라 걷는 한강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3. 4. 1. 03:20

    한강에 돌고래가 살았다는 기록은 140511월 태종실록에 큰 고기 여섯 마리가 바다에서 조수를 타고 양천포로 들어왔다. 포 옆의 백성들이 잡으니 그 소리가 소가 우는 것 같았다. 비늘이 없고 색깔이 까맣고 입은 눈가에 있고 코는 목 위에 있었다라고 써 있다 한강은 밀물일 때면 바닷물이 하천의 유로를 따라 역류하는 감조하천이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상쾡이도 바닷물을 타고 한강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에 나오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온달설화에서 고구려 장수 온달이 죽은 곳이 아단성으로 서울 광진구와 경기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성이라는 말이 있다. 아차산 정상은 약 295m로 저평한 지역이지만 주변의 평야지대와 하천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둘레는 약 1000m의 아차산성은 삼국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곳이다. 또한 백제에서 승리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지키기 위해 작은 산성인 보루를 둘렀다. 고려시대에는 여러사찰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인가가 드물고 야생동물이 많아 임금의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한때는 대통령 별장이 있기도 했다

     

    광나루
    광나루
    서울전차

    광나루는 한강 수운이 중요하게 가능하던 시절에는 수운교통의 중심지로 또 서울에 전차가 도입되었던 일제강점기에는 철도교통이 요지로 활약했다. 1930년부터 1966년까지, 동대문에서 뚝섬, 광나루까지 연결해주는 협궤전차가 있었다. 이 협궤전차는 서울 외곽과 도심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도심에서 광나루까지 전차를 타고 오면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남쪽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뚝섬까지 노선이 연장되었던 이유는 당시 뚝섬은 서울 사람들의 휴일 나들이 장소로 인기 있던 곳이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교통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뚝섬은 1949년 서울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한강 수운의 요지였지만 수운이 쇠퇴하면서 유원지가 조성되었다. 또한 조선시대부터 말을 키우는 곳으로 유명했던 뚝섬에는 1980년 후반까지만 해도 경마장이 있었는데 이를 과천으로 옮기고 2000년대 서울숲을 조성했다

     

    풍납토성(1925년이전)
    잠실 뽕나무

    백제시대에 축조된 풍납토성은 원래 둘레가 약 3.5-4km였으나 홍수로 인해 일부가 유실되어 현재 남은 것은 2.7km로 선사시대 유물부터 삼국시대의 도로와 건물터을 비롯해 토기와 같이 생활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은 성이다. 중국의 평야지대에서 주로 사용하던 방법이 백제에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의 목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대 연인원 100만명이 동원된 엄청난 토목공사라고 한다. 한편 한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잠실에 이르게 된다. 잠실이라는 이름은 국립양잠소 잠실도회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잠실도회는 조선시대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기르던 곳이다. 조선시대 후기 제작된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를 보면 우측 하단에 상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뽕나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63년 잠실지도를 보면 한강이 신천강, 송파강 두 개의 물길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의 물줄기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천강과 송파강 사이에 잠실도, 부리도라는 두 개의 섬이 있는데 이 부리도가 지금의 잠실종합운동장 부근이었다. 이때까지만 잠실은 성동구에 속해 있었고 송파강이 한강의 본류였고 신천강이 지류였기 때문에 송파강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구분했던 것이다. 1971년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인해 송파강은 극히 일부 석촌호수만 남기고 모두 육지로 메워졌고 부리도도 육지가 되었다. 신천강과 맞닿아 있는 잠실도의 북쪽 지역은 모래를 파내어 강의 폭을 넓혔다. 한강의 북쪽이었던 잠실이 인위적인 지형 변화로 인해 강남지역이 되었다. 이때 퍼낸 모래들은 주변에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와 건물을 짓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아파트에 생기면서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외지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마을공동체가 해제되었다.

     

    송파나루
    기단식돌무지무덤

    한강 수운이 원활하게 가능하던 시절, 송파나루는 북한강 상류의 강원도와 남한강 상류의 충청도를 비롯해 전국의 물건이 모여 상업이 발달한 장소였다. 육지로 개발된 지금은 송파나루터 비석을 통해 과거 이곳이 배가 드나들던 곳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전국의 탈춤꾼들이 모여 신명나는 놀이마당이 벌어졌다. 당시의 송파 산대놀이는 양반의 허위성에 대해 가면을 쓰고 조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송파나루 주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면서 송파 산대놀이도 전승이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석촌은 돌무지무덤이 많어서 지었고 290기가 넘는 무덤이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5기 정도이다. 한편 한강은 여름이면 모여들어 피서를 즐기는 얕은 강이었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유람선이 필요해서 잠실과 김포 일대의 38km에 잠실수중보와 신곡수중보를 쌓아 수심을 2.5m로 유지하게 하였다. 지금의 한강은 그 두 개의 보 사이에 갇혀 흐르지 않게 되었다

     

    저자도
    압구정

    한강처럼 이름이 많은 강도 흔치 않다. 워낙 크고 긴 강이다 보니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 달랐다. 한강 상류인 춘천 지역에서는 소양강, 평창 지역에서는 평창강, 영월지역에서는 동강, 여주지역에서는 경강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울의 행정구역에 해당하는 지역들에서는 서강, 마포강, 동작강, 노들강, 용산강, 송파강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통일해서 부르고 있는 한강이라는 이름은 바로 한강의 중심에 위치한 한강진 부근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모두들 자신이 사는 곳의 지명으로 강 이름을 정할 만큼 수려한 경치를 간직해 주변에 정자도 많다. 한강의 인공구조물인 세빛섬이 있다. 가빛, 채빛, 솔빛, 예빛의 네 개의 구조물로 되어 있다 또한 저자도라고 사라진 섬도 있는데 닥나무가 많아 저자라고 지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세력가 한명회가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에 정자를 지어 강가에 살며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자는 뜻의 압구라른 호를 따서 정자의 이름을 압구정으로 지었다 겸제 정선의 경교명승첩에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자가 바로 압구정이다 뺴어난 경치가 중국에 알려져서 사신들도 꼭 들렸다고 한다

     

    압구정

    조선 성종때 중국 사신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던 한명회가 연회를 열기에는 자신의 정자가 좁으니 국왕이 사용하는 천막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화가 난 성종은 폐단을 막기 위해 압구정을 헐어버렸다. 한강에 남아 있는 정자는 양화나루 근처에 위치한 망원정이 있다.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별장이었다. 지금의 정자는 을축년 대홍수(1925)때 망가진 것을 수리하고 복원한 것이다. 망원정에는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병인양요 때 서양 군대의 기술에 놀란 흥선대원군은 학의 깃털로 만든 배가 가볍고 빠르고 총포에 구멍이 뚫려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제작을 지시한 다음 이곳 망원정 앞에서 띄웠다고 한다. 지금 망원정 앞에는 서울함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바다를 30년간 지키고 퇴역한 서울함과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했던 잠수함까지 총 세척의 군함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빙고

    조선시대 때 현재의 용산 일대의 한강은 용산강이라고 불렀다. 한강 도성에 닿는 수운의 중심지로 그만큼 의미가 컸다. 인근에 서빙고가 있고 조선시대에 얼음이 사치품으로 여겨질 만큼 귀했다. 그래서 겨울철이면 한강의 얼음을 채취하고 이곳 빙고에 보관한 다음, 얼음을 구하기 힘든 계절에 공급하곤 했다. 현재의 옥수동 일대에 있던 동빙고도 서빙고와 같은 기능을 했다. 목조 건축물이었던 빙고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지명과 역 이름으로 남아 있다. 용산가족공원은 주한미군사령부의 골프장으로 쓰이던 부지에 그대로 조성되었고 용산에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동작대교가 휘어진 형태로 건설되었다. 다른 대교와 달리 동작대교는 주한미군기지를 관통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연결도로를 만들지 못했다. 지하철 4호선도 휘어진 형태로 건설되었다 또한 용산공원은 지금 큰 변화의 기로에 있다. 용산공원 구역을 대폭 확대하여 2027년까지 도시공원을 조성하는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도시개발과정에서 단절된 남산과 한강의 연결을 회복하는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여의도
    밤섬

    여의도는 현재 금융과 상업, 업무 기능이 집중되어 있어 서울의 부도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지역이다. 여의도도 과거에는 한강의 하중도였고 한강의 하류 부분이다 보니 대부분 지평해서 홍수가 나면 섬의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가 살짝 남아 양말산이라 불렀고 또 여의도 앞쪽으로 보이는 밤섬에도 주변보다 높은 산이었다. 그래서 물에 잠기지 않고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부르던 것이 여의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한강 하중도 중에 가장 넓은 섬이라 너벌섬이라고 불리던 것이 나중에 한자식 지명을 표기하게 되면서 너여자에 벌의자를 써서 여의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만 봐도 여의도가 그만큼 넓은 모래섬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밤섬도 원래는 지금의 규모보다 훨씬 커서 조선시대에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을 정도라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잠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던 밤섬이 1967년부터 여의도 개발사업이 시행되면서 여의도의 제방 축조에 필요한 골재 채취를 위해 폭파 해체되었다. 지금의 밤섬은 다시 자연의 힘으로 퇴적이 조금씩 이루어지면서 철새들이 돌아오고 있어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기도 했다. 밤섬에는 겨울철에 가마우지가 수없이 많이 찾아온다.

     

    안창남
    C-47 수송기
    예전 여의도광장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 알려져 있는 안창남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었다. 1917년 미국인 비행사의 곡예비행을 관람한 뒤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 안창남은 일본의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922년 금강호라는 비행기를 따고 여의도 하늘을 날았다. 이후 안창남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훈련 도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여의도는 다른 지역과 연결하기 위해 도로와 교량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자리 잡고 있던 비행장은 여의도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성남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의도 공원에 있는 C-47 수송기는 19458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대원들이 이곳 여의도까지 타고 온 비행기이다. 여의도공원이 길쭉한 모양인 이유는 과거의 활주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71년에는 이곳을 광장으로 만들고 5.16광장이라고 명명했다 최초의 민선시장인 조순이 여의도광장으로 바꾸면서 시민들의 쉼터로 조성하였다. 한강은 1970년대에는 거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부분이 매립되었고 1980년대에는 국제적 스포츠 행사를 치르기 위해 한강 주변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지면서 단절된 공간이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개발에만 치중했던 과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한강의 환경을 복원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2000년대에는 한강의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해 기능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최근에는 다시 철새와 야생동물이 찾는 환경 친화적인 공간이면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려는 구상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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