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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국가의 이윤추구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진 그리스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3. 3. 28. 03:28

    그렉시트 위기는 2010년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한 그리스가 유럽의 단일화폐인 유로화에서 탈퇴하는 시라니오를 표현한 신조어였다. 그리스 경제위기는 정부가 해외에서 자금을 마구 빌려 무분별하게 지출한 결과, 거대한 국채 더미를 끌어안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발생해 이자율이 높아지자 그리스 정부는 원금은커녕 이자도 지급하기 어려워져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국제통화기금과 유럽연합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수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그들의 긴축정책을 받아들여 치욕적 조건으로 수용해야 했다.

     

    고대 그리스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8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의 아르카이크시기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의 고전시기 그리고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의 헬레니즘시대로 나뉜다. 아르카이크 시기가 여전히 왕들이 지배하는 시대였다면 고전시기는 도시국가와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그리스문명의 황금기라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헬레니즘 시기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건설 이후 그리스 문화가 지중해는 물론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까지 확장된 시대를 일컫는다. 그리스 경제는 느린 속도지만 고전시기부터 시작해서 헬레니즘 시기까지 계속해서 발전했다. 그리스인의 넓은 저택에는 타일을 바른 천장과 물탱크가 있었다. 도자기, 금속으로 만든 식기, 항아리, 욕조, 철제 문고리, 아동용 문구 등은 상당히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수준을 보여준다 게다가 망자를 위해 묘비를 세우는 관습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의 진정한 특징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공공서비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의 하수도, 공중목욕탕, 분수 등을 물이 철저히 관리되었음을 보여주고 운동장, 정원, 극장, 도서관 등은 대중을 위한 공공재의 생산이 중시되었음을 알려준다. 당시의 다른 문명은 이후 중세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근대 네덜란드나 영국에 이르러서야 고대 그리스를 능가하는 생활수준이 등장한다 경제사 연구에서 경제발전을 나타내는 새로운 지표는 난파선이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교역도 덩달아 늘어나며 난파할 확률이 어느때보다 높다. 지중해 난파선의 수는 기원전 3세기부터 50척미만이 1세기에는 250척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대 지중해 동부는 두 종류의 정치 모델이 존재했다. 하나는 페르시아 제국처럼 황제와 수도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어 강력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관료적 국가모델이다. 이런 모델은 북아프리카 이집트에서도 파라오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두 국가는 메소포타미아나 나일강 유역처럼 거대한 평야가 있어 권력을 집중하기 쉽다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처럼 여러개의 소규모 도시국가가 서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문명권이라는 큰 그물을 이루는 모델이다. 발칸반도 끝자락에 있는 그리스 지역은 바다와 땅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데다가 많은 섬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해변과 맞닿은 육지도 평야가 아닌 산악지역이 많아 정치 분열을 초래하는 형세였다. 결국 그리스는 다양한 도시국가가 바다를 통해 소통하면서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는 다원적인 체제를 갖게 되었다 비슷한 체계가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800년까지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에 해당하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는 페니키아가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동부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에 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하면서 해양제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향후 로마제국과 대결을 벌이는 카르타고였다

     

    아고라광장

    도시국가의 또 다른 특징은 위계적 제국과는 달리 시민 사이에 상당한 평등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상시적인 전쟁의 위협에서 도시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모든 시민이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시민을 군인으로 동원하자면 도시국가의 지배계급은 일반 시민과 권력을 나눠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도시의 광장 아고라에서 열리는 민회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모델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도시국가는 외부적으로는 전쟁 위협에 시달렸지만 내부적으로는 시민들이 모여 공동으로 결정한 법체계를 갖고 있었다. 그리스문명은 바다의 문명이다. 바빌로니아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은 육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밖으로 확장해 나갔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중심국가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해군력이다. 고대의 해전에서는 배를 서로 옆에 대고 갑판에서 벌이는 백병전이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부터는 삼단노선이라는 쾌속정이 등장해 상대 배에 충돌해 박살내는 전술이 중요해졌다. 삼단노선이란 노를 젓는 노잡이가 200명이 타는 배인데 조타와 노젓는 실력이 전투에서 승패를 갈랐다. 아테네는 견고한 배를 만들었고 도시의 시민들을 해군 즉 노잡이로 동원했다. 이러한 해군력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해군을 물리치는 것은 물론 경쟁도시국가들보다 더 많은 해외식민지를 개척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해군력의 필수 요소였던 시민들이 강하게 권리를 주장하여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이루었다. 그리스는 아테네 남동쪽으로 라우리움이라는 곳에 거대한 은광을 보유함으로써 화폐공급이 수월해졌다. 그리고 국가가 화폐를 직접 주조하는 단계였다. 그리스 화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축통화로 부상했다. 이 화폐의 기본이 되는 은을 생산하는 것은 라우리움의 노예노동이었다. 아테네와 그리스는 해군력과 천연자원이 선사한 선물이었다

     

    아테네 아카데미

    그리스는 포도와 올리브농사를 지음으로써 한정된 농경지에서 고열량 식품을 생산해 경제가치를 높였다. 아테네는 소비되는 작물의 2/3 수입에 의존했다. 아테네뿐 아니라 그리스 남부나 에게해 대부분 도시국가에서 반복되었다. 곡식은 이집트나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등지에서 수입했다. 그리스는 수입품의 값은 은화로 치르고 올리브기름, 포도주 등을 수출함으로써 국제적 분업체계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한편 북해 연안에서는 주로 버터로 요리를 하고 맥주를 마시지만 지중해 연안에서는 올리브기름에; 빵을 찍어 먹으면서 포도주를 마시는 문화적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는 군사력과 노예제도와 함께 뛰어난 정치와 문화의 중심으로 경제와 문명이 만개하였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는 다시 학문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그리스의 합리적 사고와 비판적 문화는 철학이나 문학은 물론 의학, 역사학, 지리학 등 서구문명의 골격을 세웠다. 그리스 사회의 개방적 분위기를 형성했고 변화를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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