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바다에서 태어난 천년의 도시인 베네치아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3. 4. 18. 03:34

    이탈리아는 10세기 무렵부터 중북부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처럼 다수의 도시국가가 번창하면서 발달하였다. 가장 성공한 도시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밀라노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에 의하면 베네치아는 국가가 전부였고 제노바에서는 자본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고 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해양제국을 형성했다. 지리적으로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를 끼고 지중해 동부를 지배한 반면, 제노바는 티레니아해를 품고 지중해 서부를 호령하는 세력이었다. 피렌체는 로마 북쪽의 내륙에 있는 금융과 산업의 중심이었다. 세 도시국가가 열었던 서구 자본주의의 길은 16-17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대항해시대로 연결된다. 한편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고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제노바 출신이고 포르투갈을 대표해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름을 남긴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피렌체 사람이었다. 또 동양의 풍요를 꿈꾸게 한 것은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였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자본주의는 이베리아 반도와 네덜란드를 통해 영국과 미국으로까지 확장되면서 현대 자본주의 세계를 만든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베네치아는 육지에 가깝게 형성된 석호에서 솟아난 도시국가다. 중세 이탈리아를 휩쓴 침략자인 롬바르드족을 피해 바다로 이주한 사람들이 만든 도시국가가 베네치아다. 베네치아인의 대표하는 강인한 성격은 바로 자연적 조건에서 비롯된다. 베네치아는 바닷가의 모래와 늪 위에 널빤지를 깔아 물을 제거한 뒤 흙과 돌을 쌓아 광장을 만들고 건물을 지어야 했다. 베네치아는 서로 협력하여 생존했다. 따라서 국가가 주도하는 국가자본주의 정책으로 도시개발, 해외무역, 식민지 운영 등 모든 부분에서 베네치아는 공권력을 집중해 사회를 발전시키는 정책을 택했다

     

    베네치아는 선민의식을 고취하는 이념을 완성했다. 828년 일군의 선단이 이슬람제국의 지배에 들어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복음을 저술한 성자 마르코의 유해를 가져와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수호성인으로 삼았다는 전설이 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슬람 항구 관리인들을 속이려고 돼지고기 밑에 유해를 숨겨 몰래 빼내는 지혜를 발휘했다. 성인의 이름을 딴 산마르코대성당에 유해를 안치했고 이후 마르코는 베네치아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 마르코의 날개달린 사자 또한 베네치아 해군의 표식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마르코 유해의 이전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베네치아를 성공한 도시국가로 만든 것은 안정적인 정치체제이다 베네치아는 서서히 도시국가로 부상한 8세기부터 프랑스의 침략으로 무너진 18세기 말까지 1천년 동안 유럽을 대표하는 공화국 모델이었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고 엄격한 차별적 계급에 기초한 사회였다 시민권자는 7%에 불과했다. 계급사회 피라미드의 맨 위에는 베네치아의 핵심 가문들이 모여 만든 평의회가 있었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국정 운영에서 전형적인 과두제의 모습이었다. 대평의회와는 별도로 실질적으로 베네치아의 정치를 이끄는 기구는 수백명 정도 규모의 소평의회였다. 소평의회는 상원이라고도 하며 사실상 의회의 역할을 담당했다 베네치아 정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규정한 세 원칙을 결합한 것이었다. 즉 도제는 1인 지배의 군주제를 소평의회는 소수 지배의 과두제를 대평의회는 다수 지배의 민주제를 상징한다. 이 공화국 모델은 유럽에서 다양한 정치제도의 장점을 추려 만든 균형과 화합의 이상적 정치로 인식되었다

     

    갤리선

    베네치아 중심에 광장을 만들고 성당을 배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네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기 위해 특정한 건축 양식을 강요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삼단노선이 지중해를 누비면서 전쟁과 무역을 지배했듯이 삼단노선에 큰 돛을 단 베네치아의 갤리선은 지중해무역의 주역 역할을 해냈다. 베네치아의 조선산업도 국가가 관리하는 조선소가 주도하고 민간업자들이 부수적 역할을 담당하는 구조였다. 해외에 무역기지와 식민지를 건설할 때도 중앙정부가 관료를 파견해 관리하는 중앙집권 방식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 유해를 가져온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비잔틴제국은 이슬람 제국과의 무역을 금지했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교역했다. 비잔틴 제국은 1082년 금인칙서를 통해 베네치아인들에게 해군을 도맡게 했고 그 대가로 그들이 무역을 독점할 수 있게 했다 또 십자군이 서아시아에 세운 국가와도 무역을 독점하는 계약을 성사해 동방과 유럽을 잇는 중개무역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3세기가 되자 베네치아인들은 흑해까지 진출해 크림반도 등지에서 몽골제국과의 무역로를 열기도 했다

     

    베네치아가 자국을 무역 중심지로 만들고자 모든 상품은 일단 베네치아를 거치도록 강제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서아시아에서 온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면직물, 아프리카의 상아와 흑해의 노예는 베네치아에서 일단 관세를 낸 다음에야 플랑드르 함대를 통해 북유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또 네덜란드와 영국, 독일 등에서 온 말린 생선이나 양모도 베네치아를 거친 다음에야 다른 지중해 지역으로 재수출이 가능했다. 이렇게 거둬들인 관세는 베네치아 국가자본주의의 밑천이 되었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지중해를 통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남유럽을 연결하는 거점 도시국가였다. 게다가 발칸반도의 슬라브족이나 알프스산맥 너머 게르만 민족도 베네치아 와서 물건을 사고 팔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코스모폴리탄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19세기 런던이나 20세기 뉴욕이 도맡았던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 역할을 16세기의 베네치아가 이미 완성하였다

     

    베네치아에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길드를 형성했는데 13세기 10개에 불과하던 길드는 이후 142개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보석, 수예품, 향수 장식품이 있고 특히 유리산업은 유럽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쇄산업을 발전시킨 곳이 베네치아다. 베네치아에는 수백개의 인쇄소가 활발히 책을 찍어내고 있었다. 17세기에 접어들어 오페라를 대중화시키고 현대문화의 산실이 되었다. 오페라는 왕족이나 귀족의 향유물이었으나 표가 있으면 누구나 보는 대중문화로 바꾸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연극과 오페라를 즐기고 자본을 투자한 결과다. 한편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비잔틴 제국의 몰락은 베네치아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였다. 베네치아는 17세기에 그리스 남부의 크레타섬을 잃었고 18세기에는 그리스 동부의 로도스섬이나 키클라데스군도에 있는 식민지들마저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도시국가인 베네치아는 영토국가인 프랑스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군에 의해 막을 내리고 만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