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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천년전 유교를 기반으로 상업문화가 꽃피었던 송나라가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 요인은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3. 1. 5. 03:26

    국제정치나 군사적으로 보면 송나라는 취약한 세력이었고 실제로 쉽게 무너지는 경향을 보였다. 북송은 대륙의 북부를 요나라에 양분했고 남송은 아예 중화문명의 핵심인 황하 유역을 여진족의 금나라에 완전히 내줬다. 그렇지만 부국의 기준으로 살펴보면 송나라가 단연 으뜸이다. 중국은 960년부터 1276년까지 이어진 송대에 경제수준이 정점에 도달한 뒤 19세기 유럽에 추월당할 때까지 계속해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산업혁명 이전까지 이어지는 1천년의 경제 선진국이었다

     

    < 지폐를 사용하는 신용사회 진입 >

    그린백이라 불리는 미 달러나 마오쩌둥이 그려진 중국 위안화는 해당 국가의 경제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지폐는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서구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상 최초로 화폐를 지폐 형식으로 만들어 대량 생산한 것은 송나라였다. 물론 고대 그리스도 기원전부터 이미 정부가 발행한 은화를 사용했다. 하지만 금은으로 제작한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를 갖기 때문에 사회적 신뢰에 의존하는 지폐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지폐를 활용하는 화폐경제가 작동하려면 사회를 통제하는 정부의 힘이 무척 강하거나 화폐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밑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이런 형태의 지폐경제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시도되었지만 실패했고 19세기가 되어서야 영국의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를 중심으로 제대로 형성되었다. 사실 중국의 화폐 역시 춘추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조개껍데기를 사용했던 초기부터 옥이나 금으로 사용했던 시기를 거쳐 기원전 4세기 전후로 한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동전이 대규모 발행했다. 중국은 로마제국에 버금갈 정도로 영토가 거대했을뿐 아니라 중앙에 집중하는 강한 국가였다. 이런 거대한 국가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세금을 거둬야 했다. 화폐는 세금을 거두고 관료에게 봉급을 주며 벌금을 매기는 등 다양하게 활용된 경제수단이었다

     

    동전과 철전은 고대 중국 경제에서 가장 많이 활용된 기본 화폐였고 송나라 와서도 가장 즐겨 사용되는 지불 수단이었다. 하지만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고액을 거래할 일이 많아지자 동전과 철전은 보관과 휴대가 매우 불편하다는 단점이 드러났다. 처음으로 문서를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사천 지역의 상인들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상인들이 문서를 화폐처럼 사용한 것보다 몇 백년 앞선 신용화폐의 탄생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송나라 정부가 지폐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960년 나라를 세워 대륙을 지배했던 송조는 1023년 교자무라는 기관을 세워 지폐관리를 맡겼다. 처음에는 정해진 지역에서 제한된 기간만 사용되던 지폐는 점차 지역과 기간이 확대되어 송나라 말기가 되면 정부가 회주, 성도, 항주 등에 공장을 만들어 직접 화폐를 인쇄하는 조폐기능까지 관장하게 된다 항주의 조폐공장에선 1천여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일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에는 산업혁명 이전부터 대규모 지폐공장이 존재했던 셈이다

     

    < 경제 생산성 향상으로 13세기에 인구 8천만명으로 폭증 >

    바빌로니아제국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서 보았듯이 인구의 증가는 대부분 경제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중국 역사상 으뜸가는 부국인 송나라도 인구가 폭증했다. 당나라 때인 713년에 750만 호였던 가구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1207년에는 8천만명으로 불어났다.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할 수 있었던 커다란 요인은 양자강 이남 지역의 개발과 이모작이 가능한 동남아시아산 쌀의 도입이다. 11세기 송나라의 인종은 복건성의 관료를 베트남 참파에 파견해 보물을 선사하고 그 대가로 일찍 여무는 올벼의 종자를 받아오도록 했다. 올벼의 도입으로 기후가 온화한 중국 남부에선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한 연구에 따르면 1헥타르당 2800kg의 쌀을 수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 유럽의 밀 수확량은 400kg에 불과했고 20세기 초 미국 아이오와주의 밀 수확량이 2500kg을 감안하면 높은 수준이다. 밀농사와 비교하여 쌀농사는 관개시설을 건설해야 하고 노동력이 조직적으로 투입되어야 했다 관개시설을 8세기부터 중국의 양자강 하류의 농토부터 13세기에 완료했다. 원나라 통계에 의하면 양자강 하류의 농토에서 거두는 세금이 40%나 되었는데 그중 40%는 국가가 직접 소유한 농지에서 발생했다. 국가 수입의 무려 16%가양자강 하류의 국가 소유 농토에서 집중적으로 도출되었던 셈이다

     

    청명상하도(북송 수도 개봉)

    < 도시발전과 소비사회 출현 >

    송나라는 도시발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시기에 도시에 사는 사람의 비중은 전 인구의 10%에 달했는데 이는 유럽이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도달한 수준이었다.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과 남송의 수도였던 항주는 인구가 100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였다. 송나라의 모습을 그린 청명상하도는 12세기 개봉의 모습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청명절을 맞아 거리로 나온 사람들과 도시의 풍경은 당시 발달한 도시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한편 송나라의 풍요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속의 도시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과 마차, 수레로 활기차게 붐비고 있고 상점이나 장터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길에서는 서남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낙타도 있는데 송나라는 국제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강가에서도 많은 배가 떠 있는데 당시 중국의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통해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농업 생산성이 늘어나 인구가 증가하고 동시에 도시가 발달하면서 송나라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개봉과 항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서적이 출판이 되면서 대중문화를 이끌었다. 요리에 관한 책, 차에 관한 책, 술에 관한 책 등이 출간되었다. 또한 송나라 때는 다양한 수공업이 발달해서 도시의 시장은 온갖 상품으로 가득했다.. 비단과 면직이 생산되었고 종이나 칠기 바구니 등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 등 키우는 사업이 중요했다. 또한 당시 비단과 함께 도자기가 중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이 되었다

     

    < 국가안보의 취약성이 상업국가으로 발전 계기 >

    송나라가 도시가 발달하고 교역이 모두 활발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국가 안보의 취약성에서 찾을 수 있다. 북송은 중국의 전통적 중심인 중원의 개봉을 수도로 두고 있었지만 바로 북쪽에 있는 거란족의 요나라와 서쪽에 있는 탕구르의 서하에서 상시로 안보를 위협받고 있었다. 거의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놓이다 보니 중국 북부의 대규모 인구가 이 시기에 남쪽으로 이동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농업에서 발생하는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해왔는데 송나라는 이런 모델을 재현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자연히 정부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인 상업을 장려해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다.. 송나라는 과도하게 민간의 경제활동에 간여하거나 세금을 과중하게 거둬들이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어 균형 잡힌 정책을 채택하였다. 한 연구에 따르면 송나라가 교역상품에 부과한 세금은 2-5%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송나라 정부는 민간의 경제활동을 장려해 조금씩 자주 세금을 거두었다. 또한 무역하러 해외로 나간 배가 1년만에 돌아오면 일반적인 세금을 매겼지만 다섯 달 안에 귀국하면 세금을 깎아주는 식이었다. 이런 유인책을 줄수록 민간에게 더 부지런하게 교역할 터이고 같은 기간 내 더 많은 상품이 오갈 것이니 전국 항구에서 유입되는 세수 총액이 늘어날 수 있었다

     

    < 유교가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는데 >

    상업 장려는 사실 농자천하지대본을 주장하는 유교전통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위정자들은 이런 외도를 유교의 민본 사상을 통해 재해석하고 정당화했다. 남송의 고종은 해외무역으로 얻은 이윤은 무척 많다. 무역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그 이윤은 쉽게 동전 수백만 개의 액수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무역의 수익이 일반 사람들을 징세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따라서 민의 세금 부담을 덜기 위해 해외무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중국 유교사상에서 민은 국가의 기본을 형성하기 때문에 어떤 정치권력도 민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을 금기시했다. 송나라에서는 상업을 장려해 세금을 부과하는 게 민에 대한 부담을 가볍게 해주는 지혜로 통용된 것이다. 송나라는 당시 일종의 중상주의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송나라 상인들은 바다를 통한 해외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특히 1127년부터 1279년까지 이어진 남송대에 수도를 항주로 옮긴 다음부터는 광동이나 복건성을 기반으로 하는 무역이 발달하였다. 명나라 때 정화의 해외 대원정은 무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독일의 중국 역사전문가에 의하면 유교야 말로 중국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세습 귀족이 지배하던 당나라보다 과거를 통해 인재를 널리 발국한 송나라가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정책을 세우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당시의 유교란 기득권 세력의 보수적 사상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세운 신흥 세력의 혁신적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 송나라가 발명한 종이, 화약, 나침판은 원나라에 의해 세계로 전파 >

    13세기가 되면 중국도 몽골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고 무너진다. 1211년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공격해 1234년 멸망시키고 남송은 쿠빌라이칸의 공격으로 1279년 붕괴했다. 몽골의 군사력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대륙을 하나로 묶었다. 중앙아시아의 군사 대국이 중국부터 페르시아만을 거쳐 지중해와 흑해 연안까지 드넓은 대륙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13세기 들어와서 처음으로 구세계가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 마침내 동아시아와 아랍, 유럽의 소통과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에 의하면 13세기 세계체제에서 1천년전 송나라의 선진문화와 기술은 몽골제국을 통해 인도와 아라비아반도, 유럽으로 확산할 수 있었다. 인류 최대 발명품이라 일컬어지는 종이, 화약, 나침판, 인쇄술 등의 기술은 이렇게 해서 빠른 속도로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어 종이와 인쇄기술은 유럽에 지식혁명을 가져오고 화약과 나침판은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 중국과 유럽에서 정치지형에 따른 경제상황 비교 >

    중세 이후 중국과 유럽을 비교해보면 중국은 농촌에서 집마다 수공업에 뛰어들었지만 유럽은 주로 도시에 수공업이 자리 잡았다. 그 이유는 제국이 지배하는 중국은 상대적으로 농촌이 안정적이었던 반면 분열된 유럽은 전쟁이 잦아 도시가 더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장기적으로 큰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농촌보다는 도시의 노동자 임금이 더 비싸므로 유럽은 자본과 노동 중 상대적으로 자본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기술 개발이 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이로써 중국과 유럽 모두 중세부터 상업활동과 시장발달을 경험했지만 자본을 집중하고 기술개발을 통해 산업화로 나아가는 일은 유럽이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시 역사를 하나의 요인만으로 설명하려면 무리가 따르지만 정치통합과 분열이라는 요인을 경제와 연결했다는 점에서 날까로운 분석이라고 평가한다. 제국으로서 평화를 누린 중국과 전쟁이 빈번해 도시로 경제활동이 집중되었던 유럽의 운명은 대조적인 것이 흥미롭다. 단기적으로 보면 중국이 유리하여 100년 단위의 역사로 보도라도 평화가 경제에 이로웠다. 하지만 1천년 단위로 비교하면 혼란했던 유럽이 기술 개발이라는 혁신을 통해 경제발전의 선두를 점할 수 있었다는 역설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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