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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과 서양을 아우른 중세의 용광로인 이슬람 경제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3. 1. 31. 03:31

    동서로 길게 뻗은 이슬람 세계의 핵심 지역은 크게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다. 물론 세력이 강했을 때는 유럽의 이베리아반도나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으로도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슬람 세계는 지구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책에서 세계를 일곱 개의 권역으로 나누는데 이슬람이 모두 권역에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즉 서유럽, 동유럽,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등 지역과 모두 밀접하게 교류했다는 것이다. 751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제국과 동아시아의 패권국인 당나라가 벌인 탈라스 전투에서 패권다툼을 벌였고 고려시대에 한반도가 코리아로 불리게 된 것도 이슬람 황금기에 겹친다. 이슬람 상인들은 아프리카 지역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해 노예와 금, 상아와 목재를 유통시켰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자신이 상인이었다는 사실은 이슬람과 상업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도시규모는 경제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다. 이슬람이 탄생한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제국의 수도가 되었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는 이미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을 형성했던 무역도시였다. 동아시아부터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향하는 대상 행렬이 모여드는 중심지였다. 당시 다마스쿠스의 인구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8세기 중반에는 왕조가 변하면서 이슬람제국의 수도가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로 이전했다. 바그다드는 100만명에 달했다고 하였다. 또한 페르시아의 바스라에서는 883년 노예들이 잔즈반란을 일으켰을 정도로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흑인 노예를 활용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들이 운영되었다. 9세기 튀니지 지역에서 발흥한 파티미드 왕조는 이집트를 점령해 카이로를 국가의 중심으로 삼았다. 카이로는 70만명까지 늘었고 거기에는 주민들은 7층 아파트에서 생활했고 일부 큰 주거건물은 14층에 달했고 지식의 집이라는 도서관도 있고 인구밀도가 높아 미세먼지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이슬람제국도 풍요로움을 즐겼고 쌀이나, 사탕수수, 면화와 오렌지 등 다양한 농작물이 유럽대륙에 전파되었고 심지어 포도를 길러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다.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로 이슬람 대도시였고 인구가 50만명에 이르렀다.

     

    이슬람교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종교로 현대사회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안고 있다고 하나 이슬람교의 황금기에는 무척 개방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태도이다. 이슬람세계도 처음에는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거래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동화시켰다. 예언자 마함마드는 해방된 아프리카 흑인 노예 출신인 빌랄을 이슬람 최초의 무에진 즉 기도를 위해 신도를 불러 모으는 성직자로 삼았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는 1천년 넘게 이슬람 세계에 공급되면서 그 어는 곳에서도 차별된 공동체로 고립되지 않았다. 이슬람 세계는 다양한 민족과 종족이 공존한 중세의 용광로 사회였다. 실제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 지배층이 현지 기독교인들과 공존했고, 유대인들을 매개집단으로 활용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문화와 기독교를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남아시아에서는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의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고 이들의 관계망이 국제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 이슬람 세력은 초기에 호전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보였으나 다스리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점차 포용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띠었다. 이런 유연성에 의해 이슬람은 학문과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들은 번역을 통해 그리스와 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과 인도의 철학과 과학을 두루 섭취했다.

     

    12세기가 되면서 이슬람 세계는 서서히 황금기가 끝나가며 상대적으로 유럽에 뒤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이슬람 문화나 지역이 폐쇄적이고 보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개방적인 결과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제도나 관습이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어렵게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슬람세계는 리바 즉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금지했다. 이는 기독교권 유럽에도 마찬가지다. 실제 이슬람 세계에서는 더블 세일이라는 형식적인 매매 행위나 가짜 계약서 사용, 환전 등을 통해 리바를 우회하곤 했는데 이런 관습은 기독교권 유럽에도 있었다. 돈을 가진 사람과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연결하는 협업 시스템도 비슷했다. 이는 바빌로니아제국에서도 있고 이탈리아의 코멘다도 이와 비슷한 방식이다. 반면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이슬람 세계의 정치가 대조적이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들은 상인이나 자본가들이 정치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상인과 무역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이민족 용병 노예를 활용하다가 그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프리카 노예군인이 정치를 지배하게 되므로 군부는 상업이나 무역 자본을 보호하기 보다는 세금을 거두는 것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이 차이는 중상주의 경쟁에서 결정적인 갈림길이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상인들은 유럽 항구에 가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15세기에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린 튀르키예계 오스만제국이다. 몽골에 이어 중앙아시아에서 성장한 군사세력이 다시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되는데 성공한 셈이다. 권력을 잡은 오토만 제국은 오랜 기간 이슬람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발칸반도까지 점령하면서 유럽의 중심 세력을 위협하였다. 실로 오스만제국은 20세기까지 생존하면서 유럽의 강대국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국제정치를 논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은 경제기반 형성에 실패했다. 장교와 군인들에게 봉급 대신 농토를 지급하는 제도 탓에 재정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만을 위한 세원이 부족했다. 또한 자국의 상인을 보호하기 보다 통제하고 관리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유럽에서는 주식회사와 법인을 통해 큰 사업을 도모하고 이익을 창출했다. 19세기부터 유럽 세력은 오토만제국을 식민지로 먹어 들어가면서 이슬람 세계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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