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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과 해안의 조합이 가져온 풍요로운 나라인 인도의 경제적 부를 보면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3. 3. 7. 03:24
중국 다음으로 인구 13억인 인도는 출산율을 비교하면 중국이 1.6명에 불과하나 인도는 2.2명 수준으로 젊은 층도 두껍고 절대인구도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과 유사점이 많은데 거대 영토와 고대 문화의 발상지이며 산스크리트어와 힌두교로 남아시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중국은 다른 점은 중국은 기원전 206년 한나라부터 1912년 청나라가 막을 내리기까지 2천년동안 통일 왕조였으나 인도는 한번도 전국을 통합하는 정치체제를 경험하지 못했다. 영국으로 독립된 1947년 이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부탄, 방글라데스 등 여러나라로 분리되었다 한편 인도의 지리는 유라시아대륙의 한 부분이지만 사실 히말라야산맥과 힌두쿠시산맥 등으로 어느 정도 분리되고 고립된 모습이다 인도의 북부는 두 개의 큰 강인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지면서 거대한 공간을 형성한다. 한편 인도의 지리적 특징이 경제사 발달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세계경제에서 인도에서 인도의 왕국과 정치단위들을 내륙제국과 해안왕국으로 구분했다. 인도 역사에서 유명했던 거대한 제국은 예외없이 대륙 내부에 중심을 둔 세력이었다. 고대의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4세기-2세기)와 굽타제국(4-6세기) 중세의 델리술탄제국(13-16세기) 근세의 무굴제국(!6-18세기)은 기본적으로 인더스-갠지스평야를 발판으로 삼았다. 이들은 농업 중심의 군사제국이었고 농산품에 대한 징세를 통해 정치체계를 유지했다. 반면 해양왕국은 지리적으로 내륙에서 벗어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에 있었다. 인도는 인도양의 중심을 향해 머리를 불쑥 내밀고 있는데 대양에는 몬순이라 불리는 계절풍이 강하게 불어 해양운송이 수월하다 계절에 따라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여 해운이 발달했다. 인도에서 배를 통한 물류비용은 육지에서 수레를 이용한 물류비용보다 두세배나 저렴했다. 따라서 해안에 있는 작은 규모의 왕국들이 내륙의 제국보다 상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킬 가능성이 당연히 컸다 실제 인도 동부의 코로만델 연안이나 서부의 말라바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고대부터 동서양을 잇는 무역을 통해 혜택을 누리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길고도 화려한 인도의 역사에서 부국의 모델로 삼을 사례로는 850년 인도 남부 코베리강 유역에서 출범해 1279년까지 이어진 촐라제국이다. 촐라제국은 점차 세력을 넓혀 바다를 건너 스리랑카와 몰디브까지 점령한 것은 물론 저 멀리 말라카와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이 시기는 정치적 지배보다는 자국의 종교적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이었다. 촐라제국은 이슬람 상인들이 인도를 통과해 송나라까지 무역망을 확장하는 개방정책을 취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도시화가 활발하여 고대 인더스문명과 갠지스강까지 도시문화가 확장된 시기에 일어났다 중세 상인의 분산된 해안왕국의 주요 도시에서 상인은 사회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집단이다. 인도에서 아라비아반도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이집트와 홍해지역에서는 중세 인도의 면직물도 발견되어 당시의 활발했던 무역을 증언해준다
인도의 특산물을 꼽으라면 단연 섬유제품이다. 특히 면직물을 만들고 이를 다양하게 염색하며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하는 능력에서 인도는 탁월했다. 고대에 중국이 비단으로 유명했다면 인도는 비단을 도입한 뒤 면과 비단을 조합하는 능력을 키웠다. 중세에 이르러 인도의 해안도시의 발달하고 무역이 부흥하면서 면직산업은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을 선두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세력들이 앞다투어 인도양에 진출하면서 무역은 활발해졌다. 동인도회사들은 인도가 생산한 천과 옷을 일본부터 유럽까지 유통했다. 한편 유럽인들이 처음 눈독을 들인 것은 향신료인데 특히 후추와 정향을 원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를 구매하려면 현지인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인 인도의 면직물을 가져가야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주식회사는 인도 구자라트의 직물로 수마트라섬의 후추와 금을 사고 코로만델 연안의 면직물로 반텐 후추를 사는 식으로 이윤을 남기며 아시아 역내 무역에 열중했다
인도의 도시화는 17-19세기 사이에 새로운 단계를 맞는다. 이것은 영국의 동인도주식회사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이때 성장한 대표적인 도시로는 아라비아해의 접하는 뭄바이, 벵골만의 캘커타 그리고 코로만델 연안의 마드라스(첸나이)가 있다. 이 도시들은 17세기 영국이 국제무역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과거 강을 낀 도시는 내륙과의 연결을 중시했으나 새로 만들어진 도시들은 주로 대양을 마주하여 국제무역을 위해 존재했다. 뭄바이, 캘커타, 첸나이는 세계가 인도에 주문하는 섬유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기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8세기부터 내륙에 있던 무굴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정국이 불안해지면서 상당히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가 치안의 안정과 법의 질서가 서 있는 세 개의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18세기가 되면 내륙에서 해안 대도시로 인구이동이 일어나 인도의 중심이 바뀌었다. 19세기에는 영국 동인도주식회사를 매개로 인도와 중국의 자본을 연결하는 범아시아적 사업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도의 면직물 및 중국의 도자기 교역은 물론이고 중국의 차재배가 인도로 확산했으며 인도의 아편도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싱가포르나 홍콩과 같은 새로운 대도시가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세습적 신분에 따라 경제적 활동을 제한하는 카스트제도는 분명 경제발전에 걸림돌이다. 다만 과거 인도에서 발전이 이뤄진 지역은 카스트 제도가 약했던 도시들이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지금부터 약 3천년전 아리안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침투해 들어오면서 만들어졌다. 그 때문에 북부에서는 강한 카스트제도가 자리 잡았지만 남부 드라비다족의 영역은 비교적 평등한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 촐라제국의 기록 가운데 이 지역에서는 크샤트리아나(무사)나 바이샤(상인과 농부)가 거의 없었고 인구의 대부분이 수드라(천민)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때문에 수드라를 교육해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의 직업을 수행하게 했다는 사실이 있다. 남부는 카스트제도가 약했고 덕분에 경제발전의 제약도 덜했다는 의미다. 근세의 무굴제국은 중앙아시아 출신 이슬람 세력이 정권을 잡아 농촌의 카스트제도를 방치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다졌다. 영국의 동인도주식회사 또한 해양도시의 주체로 새로운 대도시를 만들면서 근대적 질서를 인도에 도입했다 이처럼 인도의 농촌을 지배하는 것은 전통적이고 불공평한 공동체였지만 도시에서는 외부인들의 주도로 새롭고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인도는 앞으로 카스트제도의 극복과 해안지역과 도시의 개방성을 확장해 인도라는 거대한 영토를 경제발전의 궤도에 올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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