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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간에 주로 이용된 전인과 궁궐에서 활약한 글월비자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3. 3. 13. 03:21

    몇 달 소식이 막혀 늘 궁금했으나 인편을 구할 길이 없고 전팽도 보내기 어려워 내내 걱정만 했다. 어제 유산에 도착하여 갑자기 네가 쓴 편지를 보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 조병덕 편지중 - 조선시대에 편지는 멀리 떨어진 이와 소식을 주고받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우체국이 없던 당시 편지는 인편으로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가는 사람에게 편지를 부탁하는 방식이었다. 인편이 있어도 거리가 멀면 언제 도착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충청도 예산에 살던 예안 이씨가 제주도에 유배 간 남편 추사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7개월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인편과 달리 품삯을 받고 일정에 맞게 편지를 전달하는 전문 배달꾼도 있었다. 이들은 전인, 전족, 전팽이라 불렀다. 전인 품삯을 받고 편지를 수취인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전인은 남다른 전문성이 요구되었다. 먼저 전인은 수취인이 사는 곳 자리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었다. 먼길을 일정에 맞춰 오가야 하므로 발걸음도 빨랐다. 물어물어 수취인을 찾았을 터이니 말귀와 길눈 모두 밝았다. 전인마다 담당지역이 있었고 각지로 떠날 전인을 관리하는 중개인도 있었다. 중개업자가 없으면 직접 전인을 구했다. 중개인에게 주는 수수료는 없었지만 이 경우 흥정이 쉽지 않았다. 급한 편지인데다 전인이 높은 가격을 부르면 고리로 빚을 내기도 했다. 빚마저 여의치 않으면 비용 일부를 수신자로 착불로 부담했다. 남다른 능력이 요구되었던 까닭에 전인은 오가는데 드는 노잣돈에 더해 품삯도 받았다. 노잣돈과 품삯은 일정과 거리에 따라 달랐다. 춘향전에서 춘향은 방자를 불러 열냥을 주고 솜옷도 한 벌해 줄테니 이몽룡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선후기 서울 임노동자 하루 품삯은 스물닷 푼으로 춘향은 임노동자 40일치 임금과 옷 한 벌을 품삯으로 제시한 셈이다

     

    민가에서 전인이 활약했다면 대궐에서는 글월비자를 두었다. 글월비자는 색장나인 밑에서 심부름을 담당했다.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궁궐에서 편지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복색을 갖추고 허리에 검은 띠를 매어 신분을 표시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수시로 편지를 글월비자가 전달했다고 한다. 1899년 독립신문에 배달도 반송도 못 한 편지가 우체사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1896년 집마다 통, 호가 부여되었으니 전하지 못할 편지는 없을 터였다. 문제는 주소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전인에게 편지를 맡기던 관습이었다 전인에게는 서울 아무 동네 김 서방이라고 일러 주면 편지는 어김없이 배달되었다. 전인은 서울 가서 김서방을 찾아 편지를 전해주는 전문가였다. 1884년 우정총국은 체전부를 뽑으며 역참에 소속되었던 역졸을 우대했다. 지리에 대한 감각도 있고 하루 100리를 걸을 수 있는 체력을 갖추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인은 전인에 더 익숙하여 체전부가 등장하고도 전인이 더 조선팔도를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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