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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떠돌이 상인들의 조직된 힘인 보부상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3. 3. 27. 03:42

    새우젓 사려 조개젓 사려 초봄에 담은 쌀새우는 세하젓이요, 이월 오사리는 오젓이요, 오뉴월에 담은 젓은 육젓이요. 갈에 담은 것은 추젓이요, 겨울 산새우는 동백젓이요. <보부상의 새우젓 타령> 조선 시대에 이러저리 떠돌며 물건을 팔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보부상이다. 보부상은 봇짐장수 보상과 등짐장수 부상을 합친 말이다. 보상은 비단, 금은으로 만든 세공품, 필목, 피혁제품, 나무 제품, 토기 등 비교적 저렴하고 부피가 큰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녔다. 도로가 발달하지 않아 상품의 유통이 어렵던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고 오일장이 생겨난 뒤로는 장날로 맞추어 순회하는 장돌뱅이가 되었다. 매매 알선과 금융, 숙박업 등을 하던 객주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농공상의 구분이 뚜렷한 시대에 사람 대접을 받기 어려운 직업이었던 데다 자본도 없었기에 더욱 천시받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동료를 모으고 계를 맺어 끈끈한 조직을 이루었다.

     

    부상과 보상은 각각의 상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구분하여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상단은 군현을 묶은 관할마다 구분하여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상단은 군현을 묶은 관할마다 임소를 두고 그 우두머리인 본방을 선출하여 사무를 맡았다. 또한 본방 중에서 접장을, 접장 중에서 도접장을 선출해 팔도를 대표하는 전국적인 조직을 이루었다. 이들은 이름과 취급 상품, 거주지 등이 적힌 신분증을 발급했고 세금도 납부했다. 혼자는 약하지만 조직을 이루면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탐관오리나 폭력배의 횡포에 공동으로 대항했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적에 황해도 토산 출신의 백달원은 800명의 보부상을 거느리고 군량미를 운반해 주었다. 그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이성계를 구해 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태조는 그 공을 치하하며 보부상단에게 어물과 소금, 토기와 나무그릇 등에 대한 전매권을 부여해 주었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산성을 지키던 권율 장군에게 양식을 조달해 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으로 양곡과 무기를 보급했으며 전투에도 참여하여 많은 공헌을 했다. 홍경래의 난 때는 의주 접장으로 있던 허항이 부상 1천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진압에 협력했으며 병인양요 때도 군량 운반을 맡았다. 그들은 갑오농민전쟁 때 관군과 일본 연합군에 참여했고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공작을 돕는 등 보수적인 성향을 띠기도 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다. 상부상조 정신으로 똘똘 뭉친 보부상은 어려움을 당하며 서로 도왔고, 성실히 일하되 같은 소속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다. 또한 혼인이나 장례에 내는 부조의 품목과 수량도 따로 정해져 있을 정도로 계산이 정확했다. 이러한 내용은 보부상이 만든 절목 등에 정리되어 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가 헤어질 때는 저고리를 바꿔 입는 풍습이 있었다. 1894년경 전국의 보부상 수는 25만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이후 길이 잘 닦이고 유통이 발달하면서 보부상은 점점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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