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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볏집으로 만든 짚신은 고무혁명으로 변했다는데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3. 3. 20. 03:22
토정 이지함이 고을 사또가 되자 큰 집을 지어서 빌어먹는 백성을 모여 살게 하고 수공업을 가르쳤다. 가장 손재주가 없는 사람은 볏집을 주고 짚신을 삼게 했다. 하루에 열 켤레를 만들어 팔아 하루 양식을 마련하고 남는 것으로는 옷을 지어 주니 몇 달 만에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졌다 - 정약용 <목민심서> -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이지함이 포천 현감을 지낼 적 일이다. 먹고살 길 없는 백성들을 한집에 모아 놓고 기술을 가르쳤다.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짚신 삼기였다. 땅이 없고 농사도 못 짓고, 밑천이 없어 장사도 못 하고, 특별한 기술도 없다면 짚신 삼기가 제격이다. 별다른 손재주가 필요없는 단순 반복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루 열 켤레만 만들면 먹고살기 충분했다. 정약용은 옥바라지할 사람이 없는 죄수도 짚신을 삼으면 옷과 양식을 마련할 수 있도록 기록했다
재료비는 들지 않는다. 볏집, 왕골, 삼베, 부들 등 재료는 지천에 널려 있다. 수요도 무궁무진하다. 짚신은 오래 쓰는 물건이 아니고 서너달 신는다. 보통 짚신은 일회용품이다. 짚신 삼기는 조선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부업이었다. 농사짓는 사람들도 농한기나 궂은 날씨에는 집에서 짚신을 삼았다. 승려들도 가을과 겨울에는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렸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을 보면 승려에게 짚신을 선물로 받았다는 기록이 많다. 전업으로 짚신을 삼는 사업들도 존재하였다. 이건창의 기록에 따르면 강화도에 사는 유 노인은 30년 동안 집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고 짚신을 삼았다. 완성하면 집주인에게 주고 시장에 가서 쌀로 바꿔 오게 했다.
부지런하면 부자가 되는 것도 가능했다. 송세홍은 두세살 무렵 서울 한복판에 버려졌다. 서울에 올라온 기장 사람이 발견하고 데려다 키웠다. 그는 낮에는 품팔이 노릇을 하고 밤에는 집신을 삼았다. 잠을 쫓으려고 후추를 찧어 눈에 발랐다. 이렇게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하던 송세홍은 돌연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절에서도 계속 짚신을 삼았다. 10년이 지나자 돈 수천냥을 모았다. 그후에도 절에서 나와 속세에서 돈을 모아 수만냥의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집안을 일으켰으니 잊을 수 없다가고 하며 마을의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짚신 삼기는 일제 강점기까지 변함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조금 이따가 고무신 혁명이 일어나자 짚신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었다. 고무신 가격은 짚신의 서너 배가 넘었지만 오래 신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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