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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을 지배한 상인과 전매사업으로 부와 권력을 유지한 권력자들
    아들을 위한 인문학/음식 2023. 3. 3. 03:42

    소금의 수요가 방대했기 때문에 상인에게 소금은 큰 부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이었다. 소금은 식염뿐만 아니라 고기나 생선의 보존용으로도 많은 양이 사용되었다. 14세기 이후에는 부활절 이전의 40일을 가리키는 사순절을 위해 발트해에서 청어를 대량으로 잡아 올려 소금에 절인 식품이 유럽각지에서 판매되었다. 예수가 광야에서 수행하며 쌓은 유덕을 기리기 위한 사순절의 40일동안은 교회가 고기 섭취를 금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짭짤한 소금에 절인 청어로 연명해야만 했다. 청어를 소금에 절이기 위해서는 청어 무게의 1/3이상의 소금이 필요했다. 1875년에는 청어 약 30억마리가 소금에 절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르네상스기에 부와 패권을 뺏기지 않으려 경쟁한 베네치아와 제노바도 모두 소금 판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도시국가 베네치아의 시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토르첼로 섬 주변의 갯벌은 베네치아 최초의 제염소로 알려져 있다. 11세기가 되자 베네치아는 유럽 내륙 지역에 소금을 판매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14-15세기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섬에서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에 이르는 염전을 지배하고 소금을 독점 판매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선박이 운반한 상품의 40%가 소금이었다. 제노바 역시 흑해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많은 제염소를 지배하고 이바사 섬을 지중해 제 1의 소금 생산지로 성장시켰다.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09)에서는 워터구젠이라고 불린 신도교의 독립파가 영국의 항구를 거점으로 하여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을 한자동맹의 여러 도시에 보내는 경로를 차단하여 경제의 큰 타격을 받은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민들의 생활에 깊게 관계하는 소금은 생산지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권력에 지배되는 경향이 강했다. 유럽 왕권이 강해진 16-18세기에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소금이 절호의 과세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전매품으로 취급되어 고액의 소비세가 부과된 것이다. 16세기 중반 프랑스 앙리 2세의 시대에는 소금에 대한 체계적인 과세가 시작되었다. 소금이 왕실의 주요 재원이 된 것이다. 프랑스 콜베르는 16808세 이상의 개인에게 매주 정해진 가격에 정해진 양의 소금 구매를 의무화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소금세를 폐지하였다가 1805년 소금세는 나폴레옹에 의해 부활하였다. 징병제에 의한 군대로 유럽의 패권자가 된 나폴레옹에게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만들기 위해 소금세를 부활시킬 필요가 있었다. 소금세는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

     

    황소 진군 노선

    중국에서는 내륙지방의 염지나 염정에서 소금이 최초로 생산되었다. 한나라 시대 이후가 되자, 바닷소금이 식염의 중심이 되었고 염분 농도가 3.5%인 바닷물은 77.9%가 염화나트륨이었는데 소금을 골라내기 위해서는 수분을 제거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한나라는 흉노족과의 대전쟁, 한반도와 베트남으로의 대원정을 반복하며 재정난에 빠진 한무제 이후 소금이 전매품이 되어 정부는 막대한 수입을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당 현종에 반기를 든 안녹산의 반란군에게 수도 장안을 점거당하여 쇠퇴한 당제국도 반란 중이었던 758년에 소금의 전매를 시작하고 소금 가격의 10배나 되는 소금세를 부과하였다. 따라서 소금 밀매가 성행하였고 당나라 말기의 황소의 난(875-884)은 소금 밀매 상인이 일으킨 농민 반란으로 당나라의 몰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나라 시기부터 20세기초 청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소금의 전매가 이어졌는데 소금에 대한 왕조 재정의 의존이 계속되어 대부분 국고 수입의 40%를 소금세가 차지하였다. 원나라 시대처럼 소금세 수입이 80%를 차지하는 시기도 있었으며 소금의 판매가격은 원가의 37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소금에 대한 무거운 세금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도 부과되었다. 20세기 민족운동으로 유명한 소금 행진은 간디가 영국 식민지 정부에 의한 소금 통제를 무너뜨리고 소금을 다시 민중의 품에 되찾으며 독립에 큰 물결을 일으킨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를 지배한 영국은 인도에 도착한 영국 선박의 안정을 위한 선박평형수으로써 소금을 운반하고 50%의 소금세를 붙여 소금 판매를 독점하였다. 또한 제염 금지법을 제정하여 인도에서의 소금 제작을 금지하였다. 소금이 민족 억압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인도 민중들의 곤궁을 강제한 제염금지법의 폐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1930년 백의를 몸에 걸친 간디는 390km정도 떨어진 단디 해안을 향해 행진을 개시하였다. 170개 마을에 소금세와 소금 전매제의 폐지를 호소하였다. 단디 해안에 도착한 간디는 제염금지법을 어기고 아주 적은 양의 23g의 소금을 만들었다. 간디는 체포되었고 제염운동이 확산되어 6만명이상의 인도인이 체포되었다.. 또한 인도 전역에서는 영국 상품의 불매운동도 일어나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간디의 소금행진은 인도의 주권자가 영국인이 아닌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민중에게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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