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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2) 쿠르드족의 싸움과 이슬람주의를 내건 에르도안의 선택은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2. 28. 03:50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은 20년동안 아랍국가들과 이란에 대한 공통된 우려에 기반을 두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에르도안이 집권하면서 그는 하마스 지도자들을 환대하고 반 유대주의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튀르키예는 아랍의 봉기를 자신들의 조상 즉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하던 지역에 옛날처럼 자국의 영향력을 다시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보았으나 상황은 녹록하지는 않다. 즉 사우디는 이슬람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고 아랍에미리트도 함께 이 지역에 힘을 보여줄 만큼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다. 그들을 핵심 주전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또한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집트도 신오스만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마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무슬림형제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세계적으로 이슬람법이 지배하는 칼리프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세부조직들을 통해 가동하는 다국적 수니파 이슬람주의 단체다. 1920년대에 이집트에서 창설된 무슬림형제단은 수년 동안 심한 탄압을 받은 끝에 아랍의 봄으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축출되고 치러진 2012년 이집트 선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군사쿠테타로 전복되고 말았다 이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사태를 맹비난 하자 새로 집권한 이집트 군사쿠테타 정부는 대립관계가 되었다.
튀르키예와 이집트는 2011년 발발한 시리아 내전 동안 또 다시 불편한 관계가 된다. 튀크키예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의 구원자로 행세하면서 시리아에 친튀르키예 성향의 정부를 수립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집트는 시시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마자 시리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비록 두나라가 동일한 이슬람 종파를 받들지는 않지만 양측 모두 에르도안에게 반대한다는 보다 큰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16년 튀크키예군이 시리아 북부를 침공했고 2018년과 2019년에 또 다시 침공하자 이집트는 아랍이 신오스만주의자들의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튀르키예가 시리아를 급습한 것은 그 지역에 쿠르드족 자치구가 형성돼서 튀르키예 내에 있는 쿠르드계가 다수인 지역과 힘을 합치는 것을 미연에 막아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 그런데다가 2016년 아사드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한 러시아의 영향력도 차단해야 했고 더불어 이미 350만명이 넘는 절망적인 사람들을 받은 입장에서 더 많은 난민 물결은 차단하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에르도안에 반기를 들고 2016년에 벌어진 튀르키예의 유혈 쿠테타 이후 나토 내에서 튀르키예의 고립은 더욱 심화됐다. 당시 소규모 군인 그룹이 이스탄불의 교량들과 텔레비전 방송국을 점령했다. 양측이 대치하다가 현정권 지지자들이 다시 상황을 장악했다. 이후 수만명이 투옥했고 쿠테타에 동조한 혐의가 있는 사람은 숙청했다. 그러면서 이 쿠테타는 미국이 뒤를 받쳐준 거대 음모라고 하였다. 튀르키예 군부 내에서 마비 바탄 즉 푸른 조국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대체로 나토 회원국이라는 지위를 회의적으로 본다. 그들은 그리스가 동조하는 미국의 책략의 도구가 되는 것은 튀르키예에 맞지 않다고 본다. 푸른조국은 주변 3개 바다인 흑해, 에게해, 동부지중해를 지배할 것이라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 생각은 오스만 제국이 영토를 잃고 오늘날 튀르키예로 쪼그라들게 만든 로잔조약을 파기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이 깔려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특히 1974년에 있었던 튀르키예의 사이프러스 침공 이후로 그리스의 튀르키예가 대립하였다
튀르키예는 흑해에 비교적 작은 함대를 두고 있을 뿐이다. 반면 2014년 크림반도를 병합한 러시아는 수년째 군사력을 키우는데 힘을 쏟고 있다. 따라서 튀르키예는 지중해 동부와 에게해에 주로 집중하는 편이다. 2020년에 벌어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분쟁은 러시아가 외교적으로 개입을 하면서 어수선하게 끝을 맺었다. 이제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분쟁은 아제르바이잔 남서부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아제르바이잔에 포함되기를 거부하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민족적으로 아르메니아계에 속한다. 튀르키예는 인종적으로 투르크계에 가까운 아제르바이잔 편에 섰고 둘이 힘을 합치면서 아제르바이잔은 승기를 잡았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가 느닷없이 밀고 들어와서 우격다짐으로 싸움을 멈추게 하였다. 한편 2020년 튀르키예는 S-400 신형 지대공 미사일을 나토의 강력한 라이벌인 러시아로부터 들여오기로 하면서 모든 나토 동맹국들의 원성을 산 것이다. 문제의 S-400은 미국의 F-35 스텔스 전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튀르키예는 아나톨리아의 발전과 쿠르드족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이 있다. 8500만 튀크키예 인구의 50%이상이 이스탄불 권역 또는 흑해와 지중해에 면한 좁은 연안지대에 모여 살고 있다. 나머지는 대륙의 산악지대 전역에 흩어져 있는데 있는데 산의 높이가 3천미터를 넘는다. 아나톨리아가 특히 동쪽에서 강력히 원하는 것은 바로 물이다. 유프라테스강의 약 90%, 티그리스강의 45%가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발원한다. 유프라테스강은 시리아와 이라크로 흘러들어가서 티그리스강과 거의 나란히 흐르다가 이라크 남부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이 두강 사이에 펼쳐진 비옥한 땅이 두 강 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메소포타미아이다. 유프라테스강은 무려 6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물, 에너지, 식량을 공급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원이다. 이것은 튀르키예가 열쇠를 지고 있다. 1960년대 후반에 튀르키예는 두 강을 따라 댐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수백개의 댐이 건설되는데 1975년에 튀르키예가 댐 건설한 뒤에 가뭄이 들어서 이라크, 시리아와 전쟁 직전 상황까지 간 적도 있었다. 1989년에는 시리아의 전투기가 튀르키예 측량기를 격추한 일이 벌어졌고 이 이듬해에는 튀르키예가 일시적으로 유프라테스 강물을 차단하자 이라크가 튀르키예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하며 나서기도 했다. 지금은 삼국의 협상으로 수력발전소를 세우기도 하지만 물 전쟁의 위험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튀르키예 내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대략 15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이 나라 총인구의 18%를 차지하는 숫자다. 이들 대다수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와 마주보는 동부 아나톨리아 산악지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 나라의 접경지대에도 또 다른 1500만명 정도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튀르키예 내 쿠르드족이 도시로 이주해 오기 시작하면서 현재 이스탄불에만 200만명이 살고 있다. 이제 쿠르드족은 이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소수 민족이 되었다 흔히 쿠르드족은 나라가 없는 가장 큰 민족이라고들 한다 물론 7500만명의 인도와 스리랑카의 타밀족이 더 큰 규모이다. 하지만 이들이 200년동안 독립 쿠르드 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을 해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나톨리아의 쿠르드족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과 충돌했고 현재도 튀르키예 공화국에 지속적으로 저항해 오고 있다.. 쿠르드족은 페르시아어와 비슷한 계열의 인도-유럽어를 사용한다. 쿠르드족 거주자들은 저마다 다른 방어를 쓰고 있다. 일부지역에서는 말이 안 통할 정도다. 그래서 늘 분열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른바 쿠르디스탄 건국에 대한 전망 때문에 각 나라에서 그들은 늘 탄압을 받는 신세이기도 하다. 튀르키예는 분열되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자국내 쿠르드족의 언어와 고유 문화를 억압하고 있다. 강제로 동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집권초기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문화적 개혁 정책을 시행하고 쿠르드족 거주지에 더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다. 심지어 그는 PKK와 휴전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이에 수백만 명의 쿠르드인들은 터키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들어줄거라 믿고 에르도안의 AKP당에 투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휴전은 불발하고 이는 새로운 폭력사태가 되고 한술 더 떠 시리아 내 쿠르드족이 터키 국경을 따라 반자치구를 형성해 나가자 PKK는 더욱 대담해졌다 튀르키예는 더 공세적 태세로 PKK게릴라군을 제압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새로운 폭력사태는 에르도안에게 쿠르드족의 지지율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지지율의 벌충을 위해 그는 극단적인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내걸는 정책을 펼쳤다. 튀르키예 정부군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쿠르드족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0년에 1934년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제정한 법을 뒤집고 하지아 소피아 박물관을 원래 용도인 이슬람 사원으로 되돌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서기 537년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교회당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1453년에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 건축물이 소프트파워로서 국가의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판단한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모두에게 개방하고 공통의 종교 역사를 기념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서구세계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다라는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세속적인 민주주의의 기반을 해체하고 이슬람 색깔이 강한 권위주의 체제로 이행하고자 했다. 한편 튀르키예는 외교전선에서 점점 더 고립으로 치닫고 있으며 신뢰 또한 잃고 있다. 나토는 튀르키예가 떨어져 나갈 것을 대비해 그리스와 루마니아에 있는 시설을 증강하고 미국의 공군기지도 아랍에미리트로 일부 옮기는 것도 검토되고 있다.. 이에 튀르키예는 무기의 국산화를 모색하여 상당히 진척되고 있고 70%이상이 자국내로 생산되고 있다 특히 F-16전투기를 대체할 TF-X를 개발하고 있다. 또한 카타르와 소말리아에 군기지를 설치했고 외부 세계에 덜 의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리아와 리비아에 자체 부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한계를 인식하고 아타튀르크 초대 터키 대통령은 서구화에 중심을 맞추면서 튀르키예를 20세기를 끌어들였다면 에르도안은 그 반대방향으로 지난 10년간 이끌고 앞으로도 그 방향으로 이끌고 갈지 수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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