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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튀르키예 1) 동서양의 교차점으로 교역의 중심지였으나 우방국이 별로 없다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2. 21. 03:12

    근래에 터키에서 터키 사람들의 땅인 튀르키예로 국가 이름을 개명했다. 튀크키예는 몽골에 있는 알타이 산맥 동쪽에서 긴 여정으로 지금에 자리 잡았다. 먼저 그들은 드넓은 아나톨리아 고원을 건너야 했다. 튀르키예의 서쪽 끝단에 있지만 현재는 이 나라의 핵심이 된 지역이다. 북서쪽으로는 마르마라해와 접해 있고 동쪽과 서쪽 해안지대에는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튀르키예에는 광대한 평야나 물자를 옮길 만한 길고 평탄한 강들은 없을지 모르지만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비옥한 땅과 깨끗한 물이 있다. 그리고 호수나 다름없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교역을 하기에도 수월하다. 이런 조건은 이스탄불이라는 핵심도시가 해상에서 공격을 받더라도 방어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튀르키예는 목좋은 곳에 자리잡아 늘 외부세력들이 호시탐탐 눈독을 들였다. 특히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무역선들이 최종 목적지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으니 그들로부터 꽤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튀르키예는 유럽으로 들어가려는 이주민과 난민 행렬이 통과하는 관문 중 하나로 그문의 열쇠를 쥐고 있다. 이로써 다른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부딪히며 자신들의 지배력과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어 신오스만주의라고 불린다

     

    십자군 전쟁
    셀주크투르크 최대영토

    튀르키예의 국토의 97%는 아시아에 속해 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나톨리아 고원이다. 오늘날 튀르키예는 그리스, 불가리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들은 일찍이 오스만 제국을 건설했을 때 만났던 이웃이다. 대략 9세기경 유목민이었던 투르계 부족들은 현재 몽골인 이스턴 스텝 지대를 돌아다니다가 알타이 산맥을 넘고 지금은 카자흐스탄 땅인 웨스턴 스텝 지대를 건넌 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앙아시아를 지나 카스피해까지 도달하는데 여기서 비잔티움 제국과 딱 마주치게 된다. 그즈음 이들은 페르시아 주변 지역에서 이슬람교를 접하면서 이교도 신앙에서 개종을 했다. 1037년 비잔티움 영토와 맞닿은 현재 아르메니아 지역에 셀주크 제국을 건설했다. 1071년에는 비잔티움 군대와 셀주크 군대는 튀르키예와 이란 국경에서 떨어진 곳에서 싸워 셀주크 군대가 승리했다. 그리고 아나톨리아에는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그리스인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다. 몇 세기가 흐르는 동안 상당수가 투르크 문화에 동화되었다. 대다수 현재 튀르키예는 카자흐족 같은 투르크계보다 아르메니아와 그리스계에 훨씬 더 가깝다

     

    오스마투르크 최대영토

    1200년대 후반에 아나톨리아 북서부 지역에 건설된 여러 토후국 가운데 오스만 가지 즉 전사 오스만이라고 불린 자가 세운 나라가 있었다. 그는 흑해 연안을 따라 비잔티움 영토를 침범해 중앙 아나톨리아까지 밀고 들어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 설립자를 기념하는 뜻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오스만리 즉 오스만을 따르는 사람들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서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이 되었다.. 오스만은 꾸준히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갔고 1453년 마침내 비잔티움 제국이 무너졌다. 그들은 아나톨리아의 넓은 내륙 지역을 평정했지만 사실상 전략적 깊이 말고는 얻은 것이 없었다. 그땅은 대부분이 메마르고 울퉁불퉁한 산지라서 작물을 재배할 만한 곳도 제한돼 있다. 또 남쪽 해안 상당 부분도 땅이 무른데다 교역에 적합한 항구들조차 거의 없다. 게다가 비좁은 해안 평야는 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오스만 제국은 내륙지역을 개발하고 거주지로 만드는데 별반 관심이 없다. 따라서 내륙의 아나톨리아 반란 세력을 누르느라 애를 썼고 현재의 쿠르드족의 봉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제국의 방어를 위해서는 아나톨리아를 이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단단히 지킬 수가 있었다

     

    케말 아타튀르크

    오스만은 이미 유럽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1300년대 초반부터 그들은 발칸 지역을 공략하곤 했다. 그러던 중에 1480년대에 우크라이나 땅인 흑해의 항구를 장악했다. 1500년대에 이르자 오스만은 발칸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비엔나가 있는 북서부까지 내리 진출하더니 현재의 헝가리까지손에 넣었다. 남쪽과 동쪽으로는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 이집트, 알제리에 이르는 지역까지 지배했다. 이렇게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합된 이 제국은 지독하게 야만적인 성향을 띄어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수니파 이슬람교로 개종시키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로마제국에 비견할 거대제국을 건설하다가 1683년 비엔나 초입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패배를 당한 이후 제국의 붕괴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서유럽 제국은 기술적으로 군사적으로 부상하고 오스만제국은 그들을 겨눌 수 있는 처지가 되지 않았다. 특히 서유럽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을 중동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1918년 휴전 협정에 따라 제국의 수도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에 점령당하고 1922년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술탄 체제는 폐지됐다. 튀르키예는 그의 연안의 여러섬의 그리스 지배와 시리아에 있는 쿠르드족 땅과 아랍 영토를 잃게 된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지금도 다투고 있다

     

    아타튀르크는 1923년 창건한 신생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앙카라가 수도 선택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명칭은 공식적으로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는 15년에 걸친 집권기 동안 나라를 획기적으로 개혁했다. 그는 현대화는 서구화라는 결론하에 일련이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며 남자들의 경우 전통적인 페즈(터키모자)를 법으로 금지했고 여자들또한 베일로 얼굴을 가리지 못하게 했다. 서양식 달력 체계가 도입되었고 읽고 쓰는 문자도 아랍어 대신 라틴 알파벳으로 교체했다. 그는 다민족적이고 다언어적인 오스만 제국 대신 터키다움에 기반을 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몰두했다. 지식인층이 사용하는 오스만 터키어는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가 혼재한 반면 대다수 문맹인 빈곤층에서는 터키어를 사용하여 언어적 균열이 발생했다. 한편 터키화 과정인 1915년부터 1923년 사이에 행해진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집단 대학살을 자행했다 전투가능 연령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과 아이들이 강제로 추방당했다. 노인들은 물과 식량도 없이 시리아 사막으로 쫓겨났다. 한편 터키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다가 소련 군대가 베를린으로 접근하고 독일의 폐색이 짙어지자 독일과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덕분에 터키는 전후 세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소집된 일련의 회담들에서 한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52년에 터키는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한다. 유럽과의 정략결혼으로 나토의 입장에서는 냉전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터키를 가입시키면 가까운 미래에 터키가 도박을 걸거나 모스크바에 의지하는 것을 막는 동시에 동맹의 남쪽 측면을 든든하게 지킬 수 있을 터였다. 1952년에 그리스도 같은 이유로 나토 회원국이 된다. 터키의 해군에게는 흑해에서 소련을 묶어두는 역할이, 육군에게는 불가리아 국경지대에서 소련 지상군을 묶어두는 역할을 주어졌다. 1960, 1971년 그리고 1980년에 터키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을 때도 나토 동맹국이 무시하며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또한 1990년대에 터키는 이라크와 카스피해에서 시작해 아나톨리아를 통과해 유럽으로 석유와 가스를 공급하는 송유관을 건설한 뒤 주요 교역로라는 위치를 되찾아가고 있다. 현 지도자인 에르도안은 종교적 민족주의와 신 오스만주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에르도안은 처음엔 총리로 이어 대통령 자격으로 터키를 모든 면에서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스탄불의 황폐안 지역에서 어렵게 자란 뒤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1994년에 그는 이슬람 복지당의 의장으로 이스탄불 시장이 되었다. 1999년에는 세속주의(케말 아타튀르크의 이념)를 추구하는 이 나라에서 이슬람 시를 읊었다는 죄로 4개월 구금이 되었고 그후 정의개발당을 창당하여 2002년 선거에 승리하여 다음해에 총리가 되었다. 한편 20019.11테러 이후의 세계에서 터키는 신중을 기해서 대외정책 기조는 이웃들과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터키는 서방 강대국들과 친한 사이를 유지하는 동시에 무역과 소프트웨어, 외교력을 이용해서 발칸 지역과 중동에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으로 10년을 보냈다. 그동안에 보스니아오와 세르비아가 화해를 하는데 힘을 보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회담도 주선했다. 적대적 관계인 아르메니아한테까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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