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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 1) 고대부터 현재까지 열강들의 게임의 대상이 된 그리스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3. 21. 03:34

    그리스 에게해 인근에 해저 가스전이 발견되면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깊숙이 내재해있던 반목의 갈등의 불씨가 또 하나 던져졌다. 여기에 전 세계 다른 나라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이 수역은 가스가 발견되기 전에도 잠재적인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의 전쟁사를 쓴 정치철학의 규범을 세운 투키디데스(기원전 4세기)는 국제정치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염감의 원천을 얻는다. 특히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신흥 강국 아테네의 부상이 패권국 스파르타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현재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터져나오는 감정에도 적용된다. 한편 그리스는 6천여개의 섬을 가지고 있고 발칸 반도 남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나라는 북쪽으로는 알바니아,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터키와 접하고 있다. 국경길이는 총 1180km에 이르지만 대부분의 국경선은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 본토는 지중해, 에게해, 이오니아해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특히 에게해는 그리스 안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가장 큰 섬은 크레타섬이다.

     

    고대부터 그리스의 지리는 이 나라를 제약하기도 열강들의 게임의 대상으로 전략시키기도 했다. 유럽의 남동쪽 귀퉁이에서 에게해를 맞대고 있는 이웃이자 숙적인 튀르키예와 대결 태세를 취하고 있는 그리스는 이제는 EU, 러시아, 나토, 어수선한 중동, 그리고 난민들이 야기한 위기의 교차점에서 서 있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전설에 따르면 이 나라는 신이 흙을 체로 걸러 세상에 뿌린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이 일을 마치고 보니 체에 바위와 돌들이 꽤 많이 남아 있어 신은 그것들을 그리스를 만들었다 그리스의 4/5는 유난히 들쭉날쭉한 봉우리들과 깊고 웅장한 협곡이 특징인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그리스 대부분 지역은 산이 많고 숲으로 뒤덮혀 있거나 토양이 좋지 않는 메마른 곳들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언덕을 등지고 형성되다 보니 뻗어나갈 공간도 부족한데다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만한 경작지를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고대에는 지형 때문에 핵심 발전 지역들끼리 연결되지도 않아서 내부 교역과 상호 교류 및 인구 증가가 힘들었고 중앙 집권적인 통제도 어려웠다. 그리고 반도의 황폐한 지형은 그리스 사람들을 유능한 뱃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결과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다.

     

    아테네는 도시국가는 이러한 지리적 배경 아래서 탄생했다. 그리스는 모든 도시국가 중 아테네는 가장 앞서가는 서구문명으로 성장해 가면서 고대 그리스와 동의어가 된 곳이다. 아테네는 현재 아크로폴리스가 서 있는 고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도시라는 의미이다. 아테네가 처음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기원전 4천년경인데 신전을 포함한 주요 건물이 주변에 세워진 것은 기원전 1500년전 무렵이었다. 고지대, 바다의 접근성, 그리고 해상 패권을 쥐겠다는 결의로 아테네는 스파르타 같은 비슷한 도시국가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아테네는 지역의 강국이긴 했지만 훨씬 강력한 적수 즉 페르시아의 맹공을 버텨낼 만큼 강한 힘을 갖추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 전투의 결말은 페르시아의 그리스 점령이었으나 이듬해에 페르시아군은 패배한다. 한편 페르시아 전쟁의 막바지(기원전 449)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기원전 431)될 때까지 아테네는 그리스 지역의 실세로 군림했다. 특히 지성의 중심지로서 향후 2500년 이상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여러 사상과 인물을 탄생시켰다.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이 시기는 교육, 건축, 과학, 토론, 예술, 그리고 민주주의 실험까지 아우르는 인류 문명에서 참으로 역동적인 순간이었다.

     

    30년이나 끌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펠포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은 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넓은 지역을 관할하던 아테네의 지배가 막을 내리게끔 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나자 아테네는 또 다시 이웃한 나라와 전쟁에 휘말렸다. 이번에는 마케도니아였다.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반도를 통일하더니 마케도니아 지배 아래 두었다. 마케도니아는 해상무역에 의존하지 않고도 강물로 농사를 지어 인구 증가로 강대해졌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 본토에는 주요 지역의 주민들을 먹여 살릴 식량을 생산할 땅이 여전히 부족했다. 그즈음 이오니아해 건너편에서 세력이 있었으니 로마였다. 따라서 로마의 지배를 받은 그리스는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로마인에게는 그리스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주어 로마제국 시대에 그리스어가 지중해 전역으로 퍼졌고 그리스 문화 또한 대대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는 2천년에 걸쳐 로마, 비잔티움, 오스만, 영국 그리고 러시아에 의해 그리스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지정학적 게임의 장으로 귀환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해 왔다 이들 나라야말로 하나같이 에게해와 지중해 동쪽을 지배하려고 했고 쇠약해진 그리스는 이 목적에 딱 들어맞았다. 서기 4세기 무렵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할된다. 동쪽의 중심 도시는 그리스어를 쓰는 비잔티움이었다. 이 도시와 지역 문화는 그리스적이었고 이후 수세기 동안에도 그 상태로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천년 동안이나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있는 동안 그리스는 이 도시의 지배를 받았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된 해였다. 이 새로운 패권이 부상하는 동안 그리스는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심지어 국민 대다수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 있음에도 정작 그리스는 그리스도교를 주로 믿는 유럽으로부터도 소외되었다. 200년동안 오스만 제국이 본토의 일부를 지배하는 동안 그리스는 확실히 주변부로 밀려났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를 정복한 뒤 비엔나가 있는 북쪽까지 진격한 1683년에 치명적인 패배로 몰락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800년에 그리스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1832년에 열강들은 그리스 주권을 인정해 주었다 이는 군주제로 바이에른 출신의 열일곱살 백작을 그리스 왕위에 올랐다. 그후 덴마크 빌헤름 왕자가 요르요스 1세로 등극하였다 그는 러시아와 영국 왕가의 친분을 이용해 더 많은 영토를 그리스로 가져왔다. 그러다가 1896년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주권 회복을 상징하게 되었다

     

    19세기에 벌어진 열강들의 패권 경쟁에서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지중해 유역에서 러시아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1870년대에 주요 강대국들 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중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을 두고 옥신각신했다. 영국은 러시아가 지중해를 봉쇄하는 것을 우려했고 수에즈운하에서 인도의 항로를 지키기를 원해서 그리스의 보호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그 바탕은 그리스가 아니라 자신들의 제국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한편 1912년 제 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먼저 몬테네그로가 오스만에 반기를 들자 뒤이어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가세했다. 1913년에는 제 2차 발칸 전쟁이 개시되었다.. 테살로니키를 차지한 불가리아에 반기를 든 것이다. 불가리아군은 그리스와 세르비아 진영을 공격했다가 이내 격퇴당했다. 이어 루마니아가 개입했고 터키가 뒤따랐다. 여기서 불가리아는 4개국에 적지 않은 영토를 빼앗겼다. 그리고 1914년 제 1차 대전에서 그리스는 3년을 관망하다가 결국 그리스는 연합군 측에 가담해서 전 병력을 북마케도니아 전선으로 보내 영국, 프랑스, 세르비아 등의 군대와 함께 불가리아의 방어선을 뚫는 데 힘을 보탰다 그리스는 파리 강화회의(1919)에서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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