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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부동산 중개업자인 집주름에서 PROTECH로 진화했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3. 2. 6. 03:06

    특별히 집주름이 나타나 생업을 꾸리니 큰 집인지 개딱지인지를 속으로 따진다. 천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성서전도시 - 조선시대에는 부동산 중개업자를 집주름이라 불렀다. 이들이 직업으로 자리를 잡은 시기는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1753년 영조실록 기사에는 부마도위의 후손 윤성동이 집주름으로 전락한 사실이 소개됐는데 그를 무뢰배라고 표현할 정도로 집주름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박지원 역시 마장전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말 거간꾼과 집주름을 거론했다. 18세기 후반 들어 집주름은 매우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한양의 부유층이 몰려 있는 청계천 북쪽 일대 북촌은 물론 몰락한 양반들과 선비들이 모여 사는 남촌,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종로 주변 외진 골목과 시장 주변의 집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은 듯하다

     

    심노숭이 1830년 완성한 저자실기에는 이익모가 179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집주름들을 불러 남촌과 북촌에서 가장 좋은 집을 소개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있다. 이익모가 구입하고 싶어 하는 집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한 집주름이 그 집은 왕자의 궁이라고 말하자 구입을 포기한다. 얼마 후 그는 상동에 있는 청주 목사 홍선양의 고택을 구입했는데 그 가격이 무려 7천냥이었다 한평생 집 욕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익모가 고민 끝에 사들인 홍선양의 고택은 당대 한양에서 가장 비싼 집 중에 하나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집주름의 수입 즉 중개 수수료는 10%라고 추정한다. 다소 많다고 생각되지만 고리대금의 연 이자가 보통 30%가 넘었다. 1922년 기사에서 서울에서 활동하는 집주름은 600명 이상이고 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이익집단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들의 대표자를 총대라 불렀는데 당시 강성구가 총대를 맡고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강성구 외 123명은 가옥중개개인조합의 활동을 반대한다는 진정서를 종로 경찰서와 경기도 경찰부 경무국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소개된 가옥중개인조합의 규정에 따르면 주택의 거래를 성사시킨 집주름은 거래가의 0.8퍼센트를 조합에 내고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에게 각각 거래가의 1.5퍼센트씩 받아야 한다. 그런데 조합의 설립과 운영에 반대하는 집주름들은 이 규정이 시세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정도의 수수료를 감당하고 집주름을 활용할리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꽤 성행한 직업인 집주름은 일제강점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복덕방에게 그 역할을 물려주게 되었다. 지금은 공인중개사로 변경되어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부여하는 제도가 된 것이다. 이것에 더 나아가 RPOTECH로 부동산 자산(property)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부동산 서비스로 진화하고 있다. 심지어는 메타버스 도입으로 가상 부동산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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