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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민들에게 소금을 유통하여 판매했던 鹽商은 어떠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3. 1. 30. 03:42

    염전에 가서 소금꾼들과 약정을 하되 서른 냥을 염전에 맡겨 3년동안 소금을 받아다가 장사를 하고 3년 후에는 맡겨 놓은 돈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하면 소금꾼들이 좋아한다. 소금을 지고 백리 안쪽을 두루 돌아다니되, 값을 당장 받아 낼 일이 아니라 외상을 남겨 두어 인정을 맺고 단골로 만들며 반드시 이득이 많을 것이다 - 동패낙송 -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쌀가게와 더불어 소금가게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 트럭에 소금을 싣고 돌아다니며 판매하고 김장철이 되어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하면 직접 배달해 주었다. 광개토 대왕이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소금 획득을 언급하고 탐라가 소금을 얻기 위해 남해안을 괴롭힐 만큼 한반도에서 소금은 예로부터 생활필수품이자 귀한 상품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의 바닷가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소금을 생산하는 곳을 염전, 염소라 했으며 생산자를 염한, 염부라 했다. 관청에 속한 염부는 염장관의 관리하에 소금을 생산하고 그 판매수익으로 생활했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을 소비처로 운송하여 판매하는 사람을 염상이라고 했다

     

    유수원의 우서에는 18세기 염상의 실상이 자세하다. 먹고살기 어려운 빈민이 대부분이었던 염상은 약간의 밑천으로 소금을 사서 짊어지고 다니며 팔았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실태를 파악하지 못해 세금 징수가 어려웠다. 소금은 생산과 판매는 많은 이득을 남기므로 국가에서 통제하지 않으면 힘 있고 돈 많은 자들이 독점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생산은 국가가 주도하고, 거대 자본을 소유한 중간 상인이 수레나 배로 전국 각지로 운송한 뒤 소규모 염상이 짊어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유통방안이었다. 조선후기에 소금 방문 판매업자로서 염상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던 듯하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성 안에 내염전, 용산염전, 마포염전, 이현에 경염전 등 소금 가게가 네곳이었으며 소금 상인 중에는 거상이 많았다. 한양에 유통된 소금은 수십만 섬이상으로 추정된다

     

    염상의 활동은 구비문학과 야담에 그대로 수용되어 부자가 된 사례가 흔하다. 노명흠의 동패낙송의 실린 염상의 부자가 된 김서방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김서방은 아내의 조언대로 보증금 서른 냥을 염부에게 맡기고 이자 명목으로 소금을 받았다. 그는 이 소금을 짊어지고 100리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외상으로 판매하면서 단골을 만들었다. 성실하게 장사한 덕분에 3년이 지나자 3천냥을 벌었다. 김 서방은 보증금을 되찾지 않고 다시 서른 냥을 지불하며 두배의 소금을 달라고 했다. 염부들은 김서방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김서방은 동생과 함께 1년동안 소금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팔다가 자금이 늘어나자 말 한 마리를 구입하여 편하게 소금 장사를 이어갔다. 다시 3년이 흐르자 김 서방은 갑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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