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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왕정, 공화정, 제국으로 번성하고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2. 12. 15. 03:08

    로마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세운 때는 기원전 753년이다. 로마도 그리스처럼 왕들의 시대를 경험한 다음 기원전 509년부터 500년 가까이 공화정을 유지한다. 그즈음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는 물론 유럽대륙과 지중해 전역으로 지배범위를 넓혀갔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부상하면서 로마의 정치체제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뀐다. 이후 유명한 게르만 민족의 남하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476년까지 황제의 통치가 계속되었다. 물론 과거 그리스의 영역이었던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비잔틴제국이라는 이름으로 15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일반적으로 고대 로마문명을 말할 때는 공화정과 제정을 포괄하는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의 1천년을 지칭한다

     

    로마제국은 전투력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풍요로왔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로마제국은 노예 착취 경제를 기반으로 하여 비교적 풍요로운 경제수준을 유지하며 발전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퇴보의 길을 걸었다고 보고 있다. 인구증가는 경제적 풍요를 의미하므로 이탈리아반도는 기원전 3세기부터 불어나기 시작해 서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6천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고 심지어는 1억명을 돌파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인구가 증가하면 가난해질 수도 있는데 개인의 생활수준도 2세기까지 꾸준히 상승했음을 보여준다. 예로 1-2세기에 노예 공급이 늘어났지만 그 가격은 계속 상승했다. 또한 동물과 생선 뼈의 양으로 고기 내지 생선의 섭취량을 예측할 수 있는데 이도 꾸준히 늘었다. 또한 채소와 과일의 섭취량도 늘어다고 한다

     

    포도와 올리브

    맬서스의 함정은 인구가 늘어나도 식량생산이 그보다 빨리 증가하지 않으면 한사람당 식량 소비량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함정이다. 로마제국은 광범위하게 이를 벗어난 경우다. 로마제국은 이집트처럼 먼 곳에서 밀을 대량 수입하였고 이베리아반도 남부에서는 은을 수입하여 화폐로 제공하였다. 게다가 북유럽의 모피나 인도의 면직, 중국의 비단, 아프리카의 금 등 구세력 전역에서 상품을 수입했다. 로마제국은 이탈리아반도뿐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포도와 올리브농사가 일반적으로 재배되었다. 포도와 올리브는 다른 곡식보다 5배 정도의 열량을 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들은 곡식보다 20배 내외로 소득을 올려 로마제국의 경제부흥의 비결이 되었다

     

    로마제국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문화를 꽃피웠다. 제국의 도시는 2500여개에 달했으며 이탈리아반도에만 400여개가 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 도시문화를 지중해 전역으로 확장한 셈이다. 이들 도시에는 대단한 규모의 공적 건물들이 지어졌다. 신전과 포럼(시장) 극장과 경기장, 공중목욕탕 등은 로마제국의 도시다운 스타일과 정체성을 부여했다. 최대 50만명의 도시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서남아시아의 안티오크 세군데였다. 제국의 수도 로마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인구가 100만명에 달하며 이는 11세기 중국 송나라 개봉과 항주, 19세기초 영국의 런던과 일본의 에도(도쿄)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중세가 되면 로마시의 인구는 3만명 내외로 대폭 줄어든다. 로마제국의 경제발전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중산층이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중간 플레브스라고 가난한 플레브스와 대비하여 귀족은 아니었지만 주택과 작업장 일터를 소유하며 여행도 다녔다

     

    로마제국은 넓은 영토에서 늘어나는 인구를 고열량 작물을 통해서 먹여 살렸고 도시들의 연결망을 만들어 평화롭고 안정적인 태평천하를 구가했다. 로마제국의 도시들은 성벽을 쌓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평화로운 세상에서 열린 공동체를 형성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은 상공업을 천하게 여겨 발전이 더뎠다고 분석된다. 실제로 로마제국에서 명예로운 활동은 전쟁과 정치였고 문학과 예술이었다. 고대 문명에서 물질적 욕심은 인간성을 녹슬게 하는 부정적 요소로 보았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파트리키 즉 귀족은 노예를 활용해 상공업이나 사업을 추진했다. 폼페이를 사회적으로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권력이 강한 귀족가문이 100여개쯤 있었는데 이들과 유사한 규모의 저택을 가진 또 다른 가문이 500여개에 달한다. 이들 저택 규모는 10여명 정도의 가사 노예를 부릴 정도였다. 이는 도시의 엘리트를 형성하는 100여개의가문을 제외하고 400여개의 가문이 놀랍게도 대부분은 주인의 사업을 도와 비서, 회계사, 대리인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노예들 가문이었다. 로마제국은 노예들도 신분상승이 가능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사회였다는 것이다.

     

    로마시는 20만명의 남성 시민에게 매달 곡식 33kg을 배급했고 시민들은 배급증서를 들고 45개의 배급소 가운데 한곳에 가서 식량을 받아야 했고 로마시는 이를 행정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군대를 운영하기 위해 30만명의 장정을 관리해야 했다. 누가 얼마만큼의 재산을 가졌는지 건강 상태는 어떠한지 등을 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로마시는 5년에 한번씩 인구조사를 진행했다. 이처럼 로마제국은 식량배급을 진행하고 재산과 군적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문자를 통해 기억을 관리하는 지식사회로 진입해야 한다. 로마의 중산층은 키케로 등의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는 독서층을 형성했다. 로마제국에서 교육은 각 가정 내에서 담당했기에 사회적 불평등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빈부의 차이가 교육의 차이로 드러난 셈이다. 하지만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거나 관료가 되어 신분 상승을 꾀하려면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를 익히고 문자를 배우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1세기부터는 심지어 해방 노예가 관료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로마제국은 놀라운 사회 개방성을 보였다

     

    풍요와 번영을 가져온 로마제국의 비결은 먼저 확고한 법체계에 있다. 로마제국은 기원전 5세기부터 1천년 동안 서서히 법체계를 완성해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법전으로 총정리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역을 하나의 법 정신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특히 로마제국은 강한 소유권을 정립했다. 토지에 대한 사용권, 임대권, 처분권 등을 구분해 제시했다. 로마제국은 민법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법치의 형태를 취했다. 또한 로마제국은 경제활동에 필수적인 인프라 제공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효율적 발전국가 모델을 제시했다. 길 주변에 농장을 만들어 도시의 시장에 농산품을 갖다 팔었다. 로마제국은 항만을 건설해 지중해 해운을 지원했고 거대한 창고를 지어 물류가 원활하게 흐르는데 이바지했다. 로마제국이 만든 수로는 근대가 될 때까지 지중해의 많은 도시에 물을 공급했다. 물론 군사적 동기이지만 경제적으로도 영향을 주었다. 로마제국은 다수의 민간인이 투자한 공동회사가 각종 국가사업을 맡아 진행했고 지배계층은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하나의 화폐체제를 이룩했는데 잔돈인 동전과 중간단계의 은화 그리고 고액권 금화가 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가 보상금인 은화 30냥은 노동자의 한달치 월급이라고 한다.

     

    로마제국이 발전하는데 원동력은 로마제국의 주변부를 지배하며 그 부를 흡수함으로써 경제발전을 했다고 하는 가설이 일반적이었으나 주변부도 중심부처럼 경제발전을 가져오므로써 이 이론이 흔들리고 다른 가설은 기후변화가 로마제국의 부를 증가했다는 것이다. 따뜻한 기후변화로 생산량이 늘어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세기부터 로마제국의 쇠퇴에서 유럽의 날씨가 추워지면서 농사도 어려워 지고 안토니아수 역병으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서로마제국은 쇠퇴하게 된다 한편 로마제국은 국가와 민간의 밀접한 협력, 안정적인 화폐 사용과 거대한 시장의 등장, 계약과 소유권을 보호하는 확고한 법체계의 형성은 로마제국의 발전을 지탱한 힘이었다.

     

    로마제국의 쇠퇴한 결정적 원인은 정치적, 군사적 질서의 약화이다. 로마제국은 너무 거대한 영토를 관리해야 했기에 외부세력의 침략에 점점 더 취약해졌고 3세기 이후 사방에서 공격받았다. 특히 북유럽에서 내려온 게르만 민족의 잦은 침략과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 잡은 무어족의 침공으로 로마제국은 화폐공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금은광을 상실하게 되었다. 은의 함량이 줄어들면서 로마제국의 화폐는 예전만큼 신뢰를 얻지 못했고 군사력을 유지하는데도 어려움을 겪는 지경에 달했다. 곳곳에서 전쟁에서 벌어지는데 군인에게 봉급으로 줄 화폐의 가치는 줄어드는 판국이었으니 정치적 군사적 문제가 화폐의 질서를 붕괴시키면서 로마제국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는 로마제국의 영광은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 것만은 아니었으며 경제적 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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