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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인삼 팔러 청나라로 간 통상외교관인 역관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12. 5. 03:40

     

    저 역관들은 한갓 자기네 목전의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여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중국돈 당전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언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 박지원 <연암집> - 조선은 정기적으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사행을 통해 외교를 맺었다. 한번에 보통 300명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어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먼 길을 다녀왔다. 그중에서 역관은 사신을 보좌하며 통역을 비롯해 현지 관리와 접촉하는 다양한 실무를 맡았다. 문제는 그들에게 정기적인 급료나 먼 길을 오가는 데 필요한 경비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한 사람이 짊어지고 다닐 만한 분량인 인삼 8자루(80근)를 거래할 권리를 부여했는데 이것이 팔포제의 시작이었다

     

    1682년 숙종 당시 인삼 한근이 은 25냥 정도였으니 인삼 80근은 은 2천냥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인삼은 중국과 일본에서 효능이 입증돼 만병통치약으로 불릴만큼 인기가 높았다. 사역원에 소속된 역관이 600명 넘었고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인원은 70여명에 불과하였다 역관들은 인삼을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져가 비싼 값에 팔고 양반들이 필요로 하는 서적이나 비단, 모자 등의 사치품을 국내에 들여와 되파는 중개무역으로 큰 부를 얻었다.

     

    이상황이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 연경에 다녀온 역관들이 중국의 패설을 많이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들여온 소설류 서적은 조선의 문학 경향을 변화시켰다. 그뿐 아니라 중국에서 수출을 금지한 화약이나 중국의 지도, 무기를 만들기 위한 물소뿔, 심지어 화포까지 몰래 들어왔다. 사행단은 북경에 2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중국 상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돌아갈 기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들은 담합을 해서 거래 시기를 지체하는 방식으로 인삼값을 폭락시켜 거래에 실패하게도 하여 역관 중에 재산을 탕진한 사례도 있었다. 여기에서 승리한 역관은 큰 부자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가문이 밀양 변씨, 인동 장씨, 해주 오씨가 있다. 17-18세기 조선 최고의 갑부들은 모두 역관가문에서 나왔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1만냥을 빌려준 변 부자가 한양 최고의 갑부 변승업의 할아버지다

     

    1680년 청과 일본이 직접 교역을 시작하면서 국내에 들여오는 은이 부족해졌고 1707년 책문 후시가 열리면서 역관들의 수입은 점점 줄어들었다. 가난한 역관들은 자신들이 지닌 팔포의 권리를 송도와 평양의 상단에 팔아넘기거가 역관이라는 직업을 버리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역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해외무역 역상의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말까지 존속했다. 역관은 중국 문인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다 19세기에 오면 조수삼이나 이상직 같은 역관은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넘어 예술활동에 전념하고 중국 문인과 직접 교류하여 그들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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