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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 돗자리를 짜는 노인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11. 21. 04:07

    시골 선비는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합격하지 못하면 음풍농월을 일삼고 조금 나이가 들면 돗자리를 짜다가 마침내 늙어 죽는다 - 김낙행 <돗자리 짜는 이야기> - 우리나라 직장인의 종착지가 모두 치킨집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조선시대 선비의 종착지는 짚신 삼기 아니면 돗자리 짜기였다. 밑천도 기술도 없고 조금만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사짓는 백성은 물론 사찰의 승려도 감옥의 죄수도 모두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보탰다. 양양 낙산사의 승려들은 모두 돗자리를 짜서 살림이 제법 넉넉했다고 한다 정승 이원익이 일흔 가까운 나이로 유배되었을 때도 직접 돗자리를 짜서 먹고 살았다. 소일거리로도 부업으로도 제격이었다.

     

    우리나라 돗자리는 고려시대부터 유명했다. 골풀로 만든 용수석, 등나무 줄기로 만든 등석이 고려 특산물로 중국에 알려졌다. 고려 돗자리는 값이 비싸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뻣뻣한 중국 돗자리에 비해 부드러워서 접어도 상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었다. 매년 중국 황제에게 진상한 용무늬 돗자리 용문석은 하나당 17가마 가격이었다. 청나라 조정의 의전 매뉴얼에 따르면 황제의 좌석에는 조선에서 진상한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흰 융단을 덮었다. 지금은 대나무 돗자리를 많이 쓰지만 조선시대에 대나무는 화살대를 만드는 전략 물자였다. 서민들은 왕골이나 부들, 볏짚으로 짠 돗자리를 사용했다. 강화 교동의 화문석이 명품 특산물로 자리 잡은 것도 이곳이 전국에서 손꼽히는 왕골 산지였기 때문이다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는 볏집 돗자리이다 돗자리 두장을 닭 5마리와 교환했다고 기록도 있다. 돗자리를 짜는 것은 제법 돈이 남아 가난한 형을 돕고 제사까지 도맡았다고도 한다

     

    돗자리는 바닥에 까는 데만 쓰는 것이 아니었다. 탈곡하는 데도 요긴했다. 연암 박지원에 따르면 조선은 중국과 달리 탈곡기가 없어 돗자리에 곡식을 올려놓고 탁탁 쳐서 껍질을 벗겼다. 하루만 지나면 돗자리는 못쓰게 된다. 그러면 새것을 짜야 하는데 돗자리를 짤 줄 아는 사람이 한 마을에 두세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문적으로 돗자리를 짜는 장인을 인장, 석장이라고 한다. 경상도에는 1천명의 석장이 있었고 안동 등 여덟 고을에서 1300장을 진상했다. 덕택에 왕실의 돗자리를 관리하는 장흥고의 재고가 많을 때는 1만장이 되었다. 하지만 중간에서 관리들이 뇌물을 요구하며 트집을 잡아 퇴짜를 놓곤 했다. 그래서 석장은 차라리 수군으로 충원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수군도 고되기로 알려졌는데 이를 짐작할 만 하다

     

    안동 선비 김낙행은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죄인의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못 보는 선비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보다 못한 아내가 이웃집 노인에게 돗자리 짜는 법을 배워 오라고 했다. 첫날은 하루 종일 겨우 한치를 짰다. 하지만 점차 속도가 붙어 하루에 그 열배인 한자를 짰다. 김낙행은 돗자리를 짜면 좋은 점이 다섯가지라고 했다. 첫째 밥만 축내는 신세를 면한다. 둘쨰 불필요한 외출이 줄어든다. 섯째 더위와 추위를 잊는다. 넷째 근심걱정을 잊는다. 다섯째 나눔의 기쁨이 있다. 그가 선비의 체통을 잊고 돗자리를 짠 덕분에 가족들은 맨바닥에 자는 신세를 면했고 남는 돗자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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