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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고달픈 입주 가정 교사인 숙사는 정승자제에게 무시당했다고 하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11. 14. 03:31

    백년 사이에 풍속이 갈수록 쇠퇴하여 꼭 스승을 집으로 데려와 먹여 주면서 자제를 가르치게 한다. 자제들은 평소 교만한 데다 먹여주는 권세를 스승을 대한다. 스승은 권위를 세울 수가 없어 꾸짖지도 못하고 회초리를 들지도 못하며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 성해응 (연경재전집) -입주 가정교사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였다. 조선시대 공부밖에 할 수 없으면 훈장 노릇을 하던지 입주 가정 교사로 남의 집에 얹혀 살며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이를 숙사라 하였다. 숙사 노릇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선비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숙사의 목표는 오직 하나 학생이 글을 깨우쳐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다. 학생이 과거에 합격하면 숙사의 인연은 끝이다. 숙사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실업자 신세가 된다. 학생도 숙사를 무시한다. 저명한 관료와 학자는 한번만 만나도 스승으로 떠받들면서 여러해 자기를 가르쳐 준 숙사는 스승으로 여기지 않았다. 성해응은 정승 집안의 귀한 자제들은 숙사를 업신여기고 치욕을 주며 못하는 짓이 없다고 하였다. 역사의 이름을 남긴 숙사도 있다. 사도 세자의 장인 홍봉한 집안의 숙사 노긍은 조선 후기 3대 천재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며 조선 최대 백과사전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의 숙사 유금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조예가 깊은 과학자였다. 소론 명문가 조현명의 숙사 강취주는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었으나 조선 전역을 누빈 여행가이자 인기 절정의 가수였다. 먹고살기 위해 숙사 노릇을 했지만 모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선비였다

     

    이귀상은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단정한 선비였다. 어찌나 단정했는지 장작을 팰 때도 나뭇결을 따라 단정하게 도끼질을 했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김성응 집안의 숙사가 되어 두 아들을 가르쳤다. 그중 한 사람이 정조의 장인 김시묵이었다. 이귀상은 여느 숙사와 달리 엄격했다. 그렇지만 자세히 가르쳐 주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웃에 사는 오원이 자기 집 숙사로 모셔 와 두아들을 맡겼다. 이들은 훗날 모두 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면서 묘지명에 공은 스승의 권위를 엄격히 세우고 절도 있게 수업했다. 자세히 가르쳐 똑똑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유익했다. 반드시 먼저 의리와 이익을 분명히 구별하고 방향을 알려 주었으니 글이나 가르치고 마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린시절부터 함께 먹고 자며 가르친 숙사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조선의 교육을 담당한 것은 퇴계나 율곡 같은 스승이 아니라 이름없는 숙사들이다. 그런데 숙사의 존재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렇다. 번듯한 정규직 교사나 대학교수만 스승이 아니다. 학습지 교사, 학원강사, 기간제 교사, 대학의 시간 강사가 없으면 우리나라 교육은 무너진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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