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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서당’ 서민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아들을 위한 인문학/미술 2021. 1. 22. 04:42
정조 문예부흥기에 화가인 김홍도는 산수화, 풍속화에 비중을 두고 그렸으나 인물화, 신선도, 화조화, 불화도 독창적 회화세계를 구축하였다. 선조는 무반출신이었으나 태어날 때는 중인으로 그의 유년시절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강세황의 단원기에 그는 젖니를 갈 나이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화법을 배웠다고 한다. 화원세계는 폐쇄적인데 외할아버지쪽이 화원명문이라 그가 외가에 드나들며 화재가 돋보여 강세황에 소개되었다고 본다. 강세황은 시, 서, 화에 능하여 김홍도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이 있었고 그의 도움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영예가 주어졌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은 안지 오래이다. 30년전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화사에 속한 일은 모두 홍도로써 주장하게 하였다.”1791년 김홍도는 충청도 연풍의 현감으로 임명돼 그는 민중들의 삶을 통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리게 되었다. 4년후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한다고 해서 현감에서 해임되고 화원으로 다시 활동하게 되었다. 50대이후는 부드럽고 서정적인 필치로 인간적으로 원숙한 화가로 거듭났다. 그의 삶이 한때 어려웠으나 그는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이 아니었다고 나오는데 조희룡의 호산외기에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그때 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 계책도 못되었다” 기록되어 있다. 김홍도는 남인 강세황과 중서출신 박지원 북학파와 교류하며 사실문학, 철학, 음악 등 다양한 소양을 접하여 풍속화와 진경산수화에 영향을 주었다. 국보인 군선도 및 단원풍속도첩에 있는 서당, 씨름 등을 통해 그의 그림은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또한 한국적인 풍토감각을 표현하며 풍속화에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하며 서민적인 풍취를 나타내며 채색의 농담으로 형체의 원근고저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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