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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16년 청을 세운 오랑캐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법은 어떠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9. 12. 05:35

    강희자전은 강희제의 명에 따라 30명의 학자들이 5년 동안 역대 자전들을 모아 종합 편찬한 한자 사전이다. 42권에 5만자가 담긴 당대까지 존재한 모든 한자를 종합했다고 할 정도의 방대한 분량이다. 사고전서는 건륭제의 명에 따라 역대 서적들을 모은 것으로 그 수가 무려 8만권에 달한다. 경사자집의 총 4부로 구성되어 사고전서라 하며, 9년 동안 수천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문헌을 복원 정리한 최대 편찬 사업이었다. 이는 청대 고증학의 업적이자 만주족의 한족 지배 정책의 일환이다

     

    명나라 때부터 중국의 지배층은 신사층이었다 신사는 지방의 중소 지주로서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의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입신양명한 지식인들로 조선의 사림과 비슷한 존재였다. 명나라때 이들은 국가 통치의 중요한 협력자였다. 관리의 수는 고정되어 있는데 비해 사회의 규모는 훨씬 커지고 복잡해진 상황에서 신사층은 지주로서의 기득권을 보호받는 대신 정부의 향촌 사회 통제에 협조하였다. 청나라로서는 이들을 회유하여 통치 체제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신사의 협조는 통치 안정의 여부를 좌우하는 핵심 사안이었다

     

    紳士는 과거에 급제한 신과 과거를 준비하는 사를 결합한 말이다. 당연히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과거합격과 관직 진출이었다. 이들이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경전 연구가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고증학이다. 고증학은 명나라 말기 고염무, 황종희 등이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는 방법론을 개발한 것이다. 일종의 과거용 공부 방법이었던 셈인데 신사층이 증가하여 과거합격이 점점 어려워지자 순수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신사를 회유하려면 지주로서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것은 물론 과거 급제의 길을 열어 주고 고증학자들의 일거리도 만들어 주어야 했다. 청나라는 만한병용제를 시행하여 만주족과 한족을 함께 관직에 임명함으로써 만주족 지배 체제에서 한족의 관직 진출이 막히지 않도록 해 주었다. 고증학 발전을 위해서는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였다. 강희자전이나 사고전서를 편찬하려면 수준 높은 문헌 고증이 필요하므로 고증학자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수천명에 이르는 재야의 고증학자들이 국가의 전폭적 지원 아래 편찬사업에 참가했다. 참가자에게는 재산과 명예, 약간의 권력도 뒤따랐다. 이로써 명 대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신사층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한족은 오랑캐의 지배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고 이는 요나 금, 몽고의 지배때 많은 저항의 원인이 되었다. 만주족 청의 지배에 대한 한족의 반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희제는 반청 사상을 가진 한족 지식인을 혹독하게 탄압하였고 옹정제는 만주족 지배에 비판적인 지식인을 탄압하는 문자의옥을 일으켰다. 건륭제 역시 사고전서를 편찬하면서 만주족에게 불리하거나 비판적인 문헌은 삭제하여 이름과 달리 불안전한 완성을 보게 하였다

     

    신사의 협조 덕분에 향촌 지배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19세기에 절강, 복건 등지에서 농민과 관청이 충돌하자 신사층이 개입하여 조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전 유목민족 지배에 비해 청에서는 정부를 뒤흔드는 대규모 농민 봉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결국 만주족은 한족 문화를 활성화시킴으로써 통치를 안정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청은 천주교의 전래는 엄격히 탄압했지만 서양의 과학기술에는 비교적 관대하였다. 아담 살이 전래한 역법이나 천문학 지식, 서양 회화의 원근법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한족에 비해 뒤처지는 만주족의 학문적 역량을 만회하고 정교한 서양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한족의 수준 높은 정신문화에 대응하고자 함이었다. 이는 조선의 북학파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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